마주하는 다음 의료-지연

19. 시작은 어렵지 않습니다.

by 최윤재

1987년 KAL기 폭파 사건의 범인으로 두 사람이 체포되었습니다. 조사 도중 한 사람이 독약을 먹고 자살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의 자살을 막기 위해 엄중한 감시가 시행되자, 그는 소변을 참았습니다. 신장은 혈액 중 몸에 이롭지 않은 노폐물을 걸러내어 소변을 만듭니다. 소변은 방광에 모이고, 방광이 다 차면 사람은 요의를 느껴 몸 밖으로 배출합니다. 방광이 다 차도 소변이 배출되지 않으면 거꾸로 신장으로 역류합니다. 몸 밖으로 배출해야 하는 유해물질이 계속 쌓이면서 점점 농도가 높아지면, 신체 균형이 깨어집니다. 결과, 요독증으로 사망합니다. 가능한 모든 자살 시도가 봉쇄된 상황에서도 시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정보원들이 받는 교육입니다. 신장이 기능을 잃어버리면, 소변이 만들어지지 못하여 노폐물이 몸 안에 쌓여 같은 결과를 초래합니다. 축적된 유해 물질을 몸 바깥으로 빼내는 방법이 투석입니다. 정기적으로 혈액 투석을 받으면 체내 노폐물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중환자실에는 24시간 지속해서 혈액 투석을 진행하는 기계들도 있습니다. 신장 이식을 받지 않더라도 기계가 기능을 대치할 수 있습니다.


심장 기능이 떨어져 말단까지 산소를 보낼 수 없다면? 체외순환막형 산화요법 (Extracorporeal Membrane Oxygenation, ECMO)이라는 방법을 동원하면, 혈액을 몸 바깥으로 꺼내어 산소를 공급하고 다시 체내로 돌려보낼 수 있습니다. 좌심실보조장치 (Left Ventricular Assist Device, LVAD)를 체내에 장치하면, 좌심실에서 대동맥으로 혈액을 보내는 것을 보조합니다. 급성 간부전은 사망률이 매우 높은 중증 질환입니다. 아직까지는 간 이식만이 유일하게 확실한 치료로 꼽히지만, 간 기능이 회복될 때까지 보조하거나 간 이식을 대기하는 동안 가교(假橋) 역할을 하는 인공 간 보조 장치도 개발되어 있습니다. 신장 기능을 대신하는 투석과 유사한 방법이지만, 투석으로 걸러지지 않는 크기가 큰 독성 물질의 제거에 효과적입니다.

장기 이식을 하지 않아도 심장, 폐, 간, 위장관, 신장 기능을 대치하는 기계들이 중환자실에 있습니다. 이런 기계들은 몇 가지를 연결하여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시작은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갖가지 장비로 절명의 순간을 모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시작한 후에 중단을 결정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렇게 되면 삶과 죽음 사이의 죽어가는 과정만을 하염없이 늘려가게 됩니다. 병실과 기계는 한정 없이 늘릴 수 없습니다. 제한된 수의 베드와 기계를 누가 사용하느냐는 문제도 쉽게 결정할 수 없습니다. 건강을 잃고 회복될 가능성은 없는데 세상 떠날 날은 미루어진 환자들은 다른 사람이나 장비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하루 종일 눈을 감고 계시는구나.

험악한 얼굴로 마리아를 노려보았다.

“세수를 어떻게 시킨 거죠? 수건으로 쓱 닦으면 끝이에요?”

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면봉에 물을 묻히고 손가락으로 눈꺼풀을 열어 눈가장자리 안쪽을 세심하게 닦았다.

“아버지께서 눈을 못 뜨신다고 하더니,” 분이 식지를 않았다. “오랫동안 닦아주지 않아서 눈꺼풀에 눈곱이 다 엉겨 붙은 거 안 보여요?

깨끗이 닦고 나자 아버지가 눈을 떴다. 여전히 아버지의 눈자위가 조금 부어 보였지만 그래도 눈을 떠 우리를 보는 눈가에 웃음이 묻어났다(143).


아버지의 눈을 닦아드린 딸은 일이 바쁘지만 효녀입니다.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와 치매가 시작된 어머니에게 간병인을 고용하여 드리고 전화를 자주 드립니다. 그러나 환자 한 사람을 제대로 보살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스스로 자기 몸을 돌보지 못하게 되면 사소한 문제도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아버지가 눈을 못 뜨신다는 말에 허겁지겁 달려와보니 원인은 눈곱이었습니다.


회진을 돌고 나오는데 옆 침대에 붙어있는 환아 이름이 낯익었습니다. 동명이인인가, 그런데 이 아이도 뇌성마비구나하며 나설 때, 병실로 들어오던 환아 어머니가 인사를 하셨습니다. 이 병원으로 옮기셨나요. 동명이인이 아니었습니다. 전공의 시절에 담당했던 환아였고 몇 년 사이에 아이가 부쩍 자라 못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그제야 왜 담당이 아닌 환아에게 눈이 끌렸는지 깨달았습니다. 누워있는 환아가 정말 깨끗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몸을 가누지 못하면 눌린 부위에 욕창이 생깁니다. 베개에 눌린 머리는 떡이 지고, 정맥 주사나 콧줄을 고정하는 테이프 자국은 여간해서 잘 지워지지 않습니다. 혈액 검사를 한 부위에는 멍이 남지요. 그러나 이 환아 몸에는 스친 자욱 하나 없었습니다. 담당간호사들은 이 어머니가 환아를 거울처럼 닦아 놓는다고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어른만큼 자란 몸을 지탱하는 것만으로도 몹시 힘들었을 텐데, 몇 년이 지나도 이렇게 눈에 뜨일 만큼 깨끗하게 돌보았을 어머니의 수고가 그대로 보였습니다.


병원에서 본 가장 헌신적인 간병인은 자기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였습니다. 부모를 돌보는 자식이든, 남편이나 아내를 돌보는 배우자 든 어머니보다 먼저 지칩니다. 그러나 간병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텔로미어(telomere) 연구로 노벨상을 받은 엘리자베스 블랙번(Elizabeth Blackburn) 교수가, 스트레스가 텔로미어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할 때 대상으로 삼은 사람이 만성질환을 앓는 아이의 어머니였습니다. 지치고 스트레스에 시달려 고생에 찌든 사람을 생각할 때 가장 쉽게 떠올리는 사람이 간병하는 어머니인 까닭이지요. 예상대로 가장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생각되고 가장 오랫동안 아이를 돌봐왔던 어머니의 텔로미어 길이가 가장 짧았습니다(144). 어쩌다 환자의 어머니까지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 무어라 할 말이 없습니다.


그때 그냥 그만둘 걸 그랬어요.

신장 전문의들은 반농담 삼아 자기들은 절대로 환자를 잃지 않는다고 자랑합니다. 투석이라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지요. 뇌를 제외하면, 대개의 장기는 기계로 대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크모든 인공호흡기든 환자는 중환자실을 떠날 수 없고 일상생활은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장기 이식으로 연결될 때까지 중간 단계일 뿐, 무한정 계속할 수도 없습니다. 다른 장기 부전과 달리 말기 신부전 환자는 투석을 하면서 병원을 떠난 생활이 가능합니다.


그때 그냥 그만둘 걸 그랬어요.

담담한 표정으로 환아의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새벽 2시, 응급으로 시행한 신장 이식 수술이 초급성 거부로 실패했습니다. 환아는 원인불명의 신부전으로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어머니의 한쪽 신장을 이식받았습니다. 이식받은 신장이 만성 거부로 기능을 잃게 되자 투석으로 유지해 왔습니다. 어렵게 조직형이 맞는 사체 신장이 나와 응급으로 이식 수술을 받았는데, 거부 반응으로 끝난 것입니다. 외과 의사가 돌아간 후에도 환아는 쉴 수 없습니다. 수술 중에 흔들린 생리적 균형을 바로 잡으려면 투석을 받아야 합니다. 다들 허탈해져 아무 말 없이 투석을 하던 중에, 아이가 잠이 들자 환아의 어머니가 혼잣말처럼 뇌었습니다. 처음 신장이 제 기능을 못한다고 들었을 때, 그때 그냥 그만둘 걸 그랬나 봐요. 그때는 아이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 줄 몰랐어요.

아이는 제대로 놀아보지도 못하고 병원과 수술과 투석에만 매달려 살고, 어머니가 자기 신장을 하나 떼어주고도 결국 제자리입니다. 그동안 들어간 치료비만도 엄청납니다. 혈액 투석은 일주일에 보통 3회, 격일로 병원에 와서 네댓 시간 기계에 매달려 있어야 합니다. 신장 기능을 대체한다고는 하지만 정상 신기능의 10% 정도를 유지하는 것으로, 그야말로 근근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수분과 전해질의 균형을 맞추는 것 이외에도 신장은 많은 기능을 합니다. 나머지 기능은 약을 복용하거나 주사를 맞아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성인이라면 스스로 챙기겠지만 소아 환자는 전부 보호자 몫입니다. 복막 투석을 받게 되면 하루 4회 투석액을 교환하는 것도 모두 보호자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과정 중에 흔히 감염이 생기고, 또 병원으로 뛰어와야 합니다. 혈액 투석을 하면 혈관이, 복막 투석을 하면 복막이 손상됩니다. 신장전문의들은 환자를 잃지 않는다고 으스대지만, 환자 입장에서는 끝없는 고생입니다. 이식이 거부로 끝나면 다음 이식의 성공 가능성도 낮아집니다. 그러나 차라리 방법이 아예 없다면 모를까 남아있는 치료를 안 받을 수도 없습니다. 기대했던 이식이 실패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니, 그동안 꿋꿋이 버텨왔던 어머니도 무너진 것이지요.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놀랐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신장 환자는 의사소통이 가능합니다. 잠에서 깨어 어머니를 찾는 아이를 보면 또 잊고 살 수 있습니다. 이 어머니도 이후로는 그런 내색을 보이신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대답이 없는 환자를 계속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가족들은 다릅니다.


열여섯 살 소년 매튜가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가족들은 8년간 집에서 매튜를 돌보았습니다. 누나 캐시는 동생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결혼식을 올리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가족들은 동생을 떠나보내기 위해 법원에 소송을 내어 연명치료를 중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법원에 제출하기 위해 내 동생이 죽기 바란다는 진술서를 쓰면서 캐시는 무너집니다.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자신이 차에 치었어야 했다는 자책, 결혼은 결국 이혼으로 끝나고, 서른이 되도록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생각에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동생이 사고를 당한 날 이후의 일들을 글로 쓰면서 겨우 자신을 되찾았지만, 누나는 열일곱부터 스물다섯까지 눈부신 시절에 차라리 죽어있는 편이 나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145). 열여섯 살 소년의 불행도 마음이 아프지만, 환자 한 사람을 둘러싼 가족의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143. 룽잉타이. 눈으로 하는 작별: 양철북; 2016.

144. Blackburn E, Epel E. 늙지 않는 비밀: 알에이치코리아; 2018.

145. Rentzenbrink C. 안녕 매튜: 이와우;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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