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문신을 해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2011년 1월, 영국 노포크에 거주하는 81세 조이 톰킨스(Joy Tomkins)씨는 가슴에 Do Not Resuscitate (DNR; 심폐소생술을 하지 마시오)라는 문신을 새겼습니다. 톰킨스 할머니는 남편이 7년간 병고에 시달리다 천천히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는 것을 보고, 응급 상황에서 소생술을 바라지 않는다는 생전 유서를 작성했습니다. 어머니와 시부모 두 분도 모두 오래 끄는 죽음으로 고통받는 것을 겪고 난 후, 자신의 바람을 확고히 하기 위해 문신을 새길 결심을 했습니다. 행여 앞으로 쓰러져 구조대원들이 가슴을 보지 못할까 봐, 등에 조그만 P.T.O (Please Turn Over, 앞으로 돌려주세요) 문신까지 새겼습니다. 톰킨스 할머니가 DNR 문신의 선구자는 아닙니다. 2003년, 은퇴한 간호사인 85세 프란시스 폴락(Frances Polack)도 가슴에 문신을 새겼습니다. 핸드백에 심폐소생술을 거부하는 DNR 문서를 가지고 다니는 것 만으로 안심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용감한 두 할머니는 확고한 의사를 가지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과감히 문신을 새겼습니다. 이렇게 문신만 새기면 안심할 수 있을까요?
59세 남자 환자를 진찰하던 의사가 가슴에서 DNR 문신을 발견했습니다. 이전의 의무 기록에서 응급 상황에서 소생술을 받겠다고 명시한 기록을 본 의사가, 어느 쪽이 정확한지 물었습니다. 환자는 가슴의 문신은 포커 게임에서 진 대가로 새긴 것일 뿐, 자신의 의사가 아니며, 아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테니 지우지도 않겠다고 말했습니다(190). 담당 의사가 오죽이나 황당하고 답답했으면 학술지에 기고했을까 싶습니다.
가슴에 새긴 DNR 문신은 심각할 뿐 아니라 복잡한 상황을 만듭니다(191).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법적으로 유효한 사전 의료 지시서가 있습니다. 정보기술의 발전으로 모든 의료 기록이 공유되고 사전 지시서나 생전 유서가 쉽게 접근 가능해지는 세상이 도래한다고 해도, 결정적인 순간에 가슴에 새긴 문신만큼 확실하게 의사를 전달하는 수단은 없을 것입니다. 두 할머니의 문신도 이런 생각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DNR 문신을 본 순간 의료진은 응급소생술을 시도하지 않고 멈칫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적절한 법적 문서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소생술을 시행하지 않아 초래된 결과의 책임은 모두 의료진에게 전가됩니다. 응급상황에서 혼란만 초래하는 DNR 문신은 세상에 별 도움이 안 됩니다.
DNR이 이렇게 논란의 대상이 된 이유는 사실 심정지 환자의 생존율이 그다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사가 갈리는 병원은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의 중요한 무대입니다. 응급실에서 심폐소생술(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CPR)을 시행하는 의료진의 모습은 그야말로 ‘드라마틱’ 하지요. 심장이 멎고 숨을 쉬지 않는 환자에게 순식간에 달려들어 초를 다투며 가슴을 압박하고 인공호흡을 합니다. 환자에게서 떨어지세요! 지시에 일사불란하게 뒤로 물러서면, 제세동기가 멈춘 심장에 전기 충격을 가합니다. 순간, 직선으로 이어지던 심전도가 커브를 그리기 시작하고 환자는 의식을 되찾습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이런 CPR 모습에 익숙한 사람들은 마술적인 결과를 기대합니다. 아쉽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1996년 일군의 의사들이 모여 1994년과 1995년에 방영된 의학드라마 응급실(ER), 시카고 호프(Chicago Hope), 긴급출동 911(Rescue 911) 시리즈를 모두 시청하고 분석했습니다. 총 97개 프로그램 중 CPR이 60회 등장했는데 CPR 받은 환자의 75퍼센트가 생존했습니다(192). 넷 중 셋이 생존하는 게 현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미국의 응급실에서 치료받은 심정지 환자의 생존율은 10.4퍼센트, 병원 내에서 발생한 심정지로 치료받은 환자는 22.7퍼센트입니다. 개발도상국으로 가면 생존율은 더 떨어집니다(193). 흉부압박법과 구강 대 구강 인공호흡법 같은 소생술의 기초는 이미 1960년대 중반에 고안되었습니다. 이후 과학과 의학 분야에서는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지만, 놀랍게도 심정지환자의 장기생존율은 특별히 향상되지 않았습니다(194). 더욱 암울한 것은 가까스로 살아난 후에 남는 신경학적 후유증입니다. 병원 밖 심정지(out-of-hospital cardiac arrest, OHCA)의 예후와 신경학적 후유증은 매우 불량하며 지난 30년간 거의 정체 상태라는 보고가 있습니다(195). 이런 연구 결과를 읽고 나면 기운이 빠집니다. 차라리 어떤 상황에서도 꼭 CPR을 받아야겠다는 사람만 CPR 문신을 새기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생각들 정도입니다.
병원 내에서 발생한 심정지 환자의 생존율이 높은 것을 다행이라고만 생각하고 넘길 수도 없습니다. 어떤 환자가 CPR을 받는지가 중요합니다. 만성질환이나 암을 오래 앓고 쇠약해진 환자가 생명이 다했을 때에도 별다른 의사표시가 없다면 급성 심근경색 환자나 마찬가지로 CPR을 받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CPR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흉부 압박으로 갈비뼈가 부러지는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 혈액암으로 골수기능이 떨어진 환자는 혈액 응고가 되지 않아, 여기저기서 출혈이 지속하고 온몸이 멍 투성이가 됩니다.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길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환자에게 CPR은 폭행이나 고문일 뿐입니다. 더 이상 암세포에 듣지 않는 항암제는 다른 정상 세포에는 그냥 독약입니다. 회복이 불가능한 환자에게 위루로 영양을 공급하고 투석으로 노폐물을 제거하는 것은 낡은 스펀지에 물을 부었다가 쥐어짜기를 되풀이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얼마 전 친척 노인이 세상을 떠났다. 병명은 근 위축증이라고 했다. 유족은 “안타깝고 가여워서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었어요” 하며 울었다. 마지막에는 듣지도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여기도 관, 저기도 관, 관에 감겨 움직일 수도 없었어. 본인도 괴로우니까 관을 빼내려고 했지만 손을 움직일 수가 없는 걸……” 옆에서 듣고 있던 내가 차마 듣기가 괴로워 화를 냈다. “80이 넘어 근위축증에 걸리면 치료가 되지 않는다는 건 알 텐데…… 그따위 주사관 같은 건 빼버리고 집으로 데리고 갔으면 좋았을 걸……” 노인은주사관에 감겨 집에 가고 싶다고, 죽고 싶다고 하면서도 몇 달간을 더 연명한 후에 드디어 숨을 거두었다. ‘드디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표현이지만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아아, 이제는 편해지시겠구나, 고생하셨어요, 하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한다(196).
안타까운 이야기지요. 만일 위 이야기의 노인이 현재 한국의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황이라면 주사관을 빼고 집으로 갈 수 있을까요. 한국에서는 연명의료결정법이 2018년 시행되면서 연명의료계획서 (이하 계획서)와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이하 의향서)가 법적인 효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계획서는 말기 혹은 임종기 환자가 의사와 함께, 의향서는 모든 성인이 언제든 직접 작성할 수 있습니다. 연명의료시행 여부와 호스피스 이용 여부를 결정합니다. 위의 노인은 듣지도 말하지도 못했으니 입원 중에 계획서를 작성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사전에 작성해 놓은 의향서가 있거나 가족 모두가 합의한다면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겠지만, 생애 말기가 아니라 임종기에 진입했다는 판단이 있어야 합니다. 임종기에 진입하기 전까지는 영양 공급을 중단해서는 안되니 주사관을 뺄 수 없는데 임종기 진입을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연명의료결정법이 제정되자 역설적으로 계획서나 의향서를 제외하고는 흔히 생전 유언으로 미리 작성해 놓은 서류나 양식을 갖추지 않은 DNR 요청도 법적인 효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까다로운 법 때문에 분쟁에 휘말릴 것을 두려워하는 의사들의 소극적인 태도로 연명의료가 도리어 더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도 만만치 않습니다. 어렵게 제정된 법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지 않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려면 보완이 필요합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우선 자신의 의사를 정확하게 알리는 문화가 자리를 잡는 것입니다.
190. Cooper L, Aronowitz P. DNR tattoos: a cautionary tale. J Gen Intern Med. 2012;27(10):1383.
191. Smith AK, Lo B. The problem with actually tattooing DNR across your chest. J Gen Intern Med. 2012;27(10):1238-9.
192. Volandes A.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꼭 해야 하는 이야기들: 청년의사; 2015.
193. Murugiah K, Chen SI, Dharmarajan K, Nuti SV, Wayda B, Shojaee A, et al. Most important outcomes research papers on cardiac arrest and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Circ Cardiovasc Qual Outcomes. 2014;7(2):335-45.
194. Parina S, Young, J. 죽음을 다시 쓴다.: 페퍼민트; 2013.
195. Myat A, Song K, Rea T. Out-of-hospital cardiac arrest: current concepts. Lancet. 2018;391:970-79
196. 사토 아이코. 마흔, 이렇게 나이 들어도 괜찮다: 예인;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