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도 그림을 놓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대형 온라인 화방에서 재료를 주문했었다. 캔버스와 물감, 붓. 서랍을 열 때마다 묘한 설렘이 있었다.
작업은 나에게 언제나 조용한 의식이었다. 붓에 물을 묻히는 손끝, 캔버스에 처음 닿는 색의 떨림, 마른 물감 아래에서 비로소 완성된 색채의 무게. 카페가 한가한 시간, 나는 작업을 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색을 바꿨다. 제주의 빛은 도시의 빛과 달랐다. 더 선명하고, 더 솔직했다.
한 작품을 완성해 카페 벽에 걸었을 때, 손님들이 그림 앞에서 멈춰 서는 순간이 좋았다. 누군가는 사진을 찍어가고, 누군가는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림은 말을 걸지 않지만, 누구에게는 위로가 되고, 누구에게는 질문이었다. 그 반응들이 나를 다시 붓 앞으로 이끌었다.
나는 언젠가 작은 갤러리를 운영하고 싶었다. 거창하지 않아도 좋았다. 조용히 그림을 볼 수 있는 공간이면 충분했다. 그래서 카페 벽은 나의 첫 전시장 같았다.
전시회와 협회 공모전에 출품도 했다. 한국서화협회 PCAF 서양화 부문에 작품을 냈고 가작을 수상했다. 상장과 작품 전시는 내게 큰 힘을 주었다. 미술을 배웠던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명성과 규모보다는 관람자의 호흡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서둘러 대중을 모으기보다, 한 사람이라도 그림 앞에서 쉼을 얻었으면 했다. 그 바람은 작은 갤러리의 형태로 조금씩 현실이 되었다. 언젠가 진짜 작은 전시 공간을 마련해 작가들과 전시를 열 생각을 한다. 제주에서의 삶은 때로 거칠었고 예측 불가였지만, 그림 앞에 서면 숨이 고르게 정리됐다.
그림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시간과 고민을 들인 만큼, 그대로 화면 위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