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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Oct 25. 2019

나눠 먹자구요?

꽤 오래 전 아담한 규모의 보습학원에서 강사로 일한 적이 있었다. 

막 시작하는 학원이라서 원장과 그의 사촌동생인 부원장, 그리고 전임으로 출근하는 나까지 그 학원의 고정멤버는 달랑 세 명이었다. 구성원 셋 중 감투가 둘인 것이다. 그 마저도 부원장은 수시로 외근(?)이라는 이름으로 나돌아 다니기 일쑤였으므로 원장과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같이 보내야 했다. 


원장은 당시 30대 후반의 남자였다. 원장의 아버지는 이 소도시에서 제법 행세깨나 한다는 **신용금고의 사장이었고, 원장 본인은 서울 h 대 출신 수학박사학위 소지자로 모교에 시간강사로 출강도 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자부심이었고, 수시로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갑과 을은 원래 상, 하가 아니라 편의상 '너'와 '나'를 대체하는 문서상의 표현일 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상하관계, 오너와 고용자의 관계를 이르는 말로 굳어진 지 오래였으니 그때 그는 갑, 나는 을이었다.


그가 특별히 ‘갑질’을 한 것은 없다.

단지, 그가 사람의 우열을 가림에 있어 학벌과 경제력이 그 나름의 기준이었기에 지방대 출신에, 탈탈 털어도 주머니와 가방에서는 먼지와 함께 지난달의 내가 ‘지르신’ 카드명세서만 나오는 나는 그에게  ‘열등시민’ 이었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을 싫어했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뭣도 모르는 멍청한’ 사람들이라며 서슴없이 비난했다. 깊이도 없는 우매한 대중들이 그의 만들어진 이미지 하나에 열광한다는 것이다. 그의 주된 비난 포인트는 ‘세금을 너무 많이 뜯어간다.’ 는 것이었는데 능력이 있어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왜 힘들게 일하고 박탈감을 느껴야 하냐는 논리였다.

(정작 학원은 신생이라 매출이 거의 없었고, 따라서 세금은 시설투자비 명목으로 제로였거나 환급 상태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본인의 출신성분이 '부유층'이라는 그 계층의 공감대 안에서 살고 있었나보다.)


그의 가진 자의 울분토로는 한 끼에 5000원 짜리 배달음식을 앞에 두고 갑과 을이 마주앉는 점심시간마다 되풀이 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저 ‘저 인간이 입 좀 다물었으면 좋겠다’만 속으로 되뇌었다. 

그러나 입을 다물기는 커녕 점심시간 마다 지치지 않고 이어가던 그의 타령이 자신의 생각에 동조하기를 강요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나는 그간의 묵묵부답을 깨고 말문을 열었다. 


"저는 원장님이랑 생각이 달라요. 근데 저는 원장님을 굳이 설득할 생각이 없어요. 저도 설득하지 마세요."


원장은 불쾌했었는지, 굳이 한 마디를 보탰다.


"음, 선생님은 세금을 많이 안 내서 불만이 없는가봐요."


뱅글뱅글 돌아가는 안경 너머로, 다 큰(?) 남자의 뾰로통한 눈동자가 샐쭉거리는 모양새를 보는 내 입에서 필터를 거치지 않은 말이 툭 튀어나왔다. 


"원장님이 월급을 많이 주시면 제가 세금을 많이 내겠죠."


한 동안 삐친 원장은 따로 점심을 먹었다. 혼자 먹는 점심에 나는 크게 불만이 없었고, 곧 파트타임으로 출근하는 다른 강사들이 생겨서 돌아가면서 그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으므로 심심하지도 않았다. 고로 원장의 부재는 오히려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또 한 번 원장과 나만 점심시간에 학원을 지킬 일이 생겼다. 

당연히 그는 안 먹겠지만, 예의상(?) 물어는 봐야겠기에 점심 뭐 드실 거냐고 물어봤다. 그런데 세상 피곤한 얼굴로 배달음식 전단지를 쩝쩝거리며 뒤적거리던 그가 황당한 대사를 치는 것이다 .


"나는 입맛이 별로 없는데, 선생님 드시는 거 몇 숟갈 먹을게요. 하나 시켜서 나눠먹죠."


what? 

이건 고려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남겨서 버리는 한이 있어도 나눠 먹긴 싫고, 저도 입맛이 없어졌으니 오늘은 나가서 커피나 한잔 사 먹고 바람 좀 쐬고 들어오겠다고 그대로 나가버렸다.

세금도 많이(?)내신다는 분이 누구더러 밥 한 그릇을 나눠먹자는 것인가?


그리고 얼마 후에 그 학원을 그만두었다.

밥을 나눠먹자고 해서는 아니고, 새로 오실 ‘명문대’ 출신 파트 타임 강사 시간을 맞춰 주느라 내 동의도 없이 내 수업 시간표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려서였다. 그 시간표 대로라면 나는 출근 후 첫 수업을 하고, 그야말로 멍 때리고 앉아 있다가 마지막 타임 수업을 하고 집으로 들어가야 할 형국이었다. 이미 그 전에  몇 차례 근무시간과 그에 따른 급여문제로 지루한 면담 끝에 내가 그냥 그만두니 마니 실랑이를 했었고, 신생학원이라 사정이 어려우니 조금만 봐 달라... 급여를 올리긴 어려우니 가능한 공강시간 없이 시간을 조절한 후, 수업이 끝나면 바로 퇴근하는 걸로 얘기가 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꼴이었다.

그 꼴에 동의를 구한답시고 원장이 한다는 말이 "훌륭한 선생님을 모셔야 우리 학원이 잘 되고, 그래야 선생님도 앞으로 더 좋아질 거니까 양해 바란다." 였다.


그대로 가방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밤늦도록 원장, 부원장이 번갈아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참 후에 학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화를 버럭버럭 내는 부원장에게 아무리 고용자와 피고용자의 관계라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시라고 내 뜻을 전했다. 그에 부원장은 후임자 구할 때 까지 마무리 하지 않으면 월급을 주지 않겠다고 했다.


“네, 부자되세요.”


나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야말로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는 게 아니었던’ 시절이었다.




과자 한 봉지 사러갔다가 ‘나라에서 세금을 너무 많이 뜯어가서 먹고 살기 힘들다’는 근방에서 장사 제일 잘되기로 소문 난 우리 동네 수퍼 사장님의 하소연을 한참 듣고 왔더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 야근을 하면서 과자나 뜯어먹고 있는 내가 이제는 '돈도 없고 가오도 없다' 싶어서 조금 서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수퍼 사장님. 부가세는 사장님이 내는 세금이 아니에요.

물건 사는 내가 내는 거에요. 

그리고 그때 그 원장님! 부가세는 내가 당신보다 훨 많이 냈어요. 

남의 밥 뺏어먹으면서 아끼던 너님과 달리, 버는 족족 지르던 그때의 내가 있었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등짝 패고 싶은 나지만.)

그리고 다시 생각해도 기가찬다. 나눠먹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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