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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Oct 21. 2019

책:철학자와 늑대

행복이라는 게 토끼보다 좋은 거야?

“ 이 책은 ‘브레닌’ 이라는 늑대에 관한 이야기이다.”


책의 첫 장, 첫 문장이다.

이 책은 철학자인 저자가 자신이 사랑했던 늑대와 함께 한 10여년의 시간의 기록과 그에서 파생된 철학적 담론을 담고 있다. 또한 정직한 제목만큼이나 저자의 늑대에 대한 '편애'가 곳곳에 드러난다.





나는 그 동안 내 삶에 스며들었던 지식을 바탕으로 ‘인간은 사유(思惟)의 동물이고, 선악을 구별하는 도덕적인 존재이며, 서로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사회를 구성하고 문명을 이룩했으며 끝없이 삶에 도전하고, 노력하며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다른 존재보다 우월하다는 믿음또한 당연하게 받아 들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듯 당연히 인간은 늑대보다 우월한 존재인가? 그에 대해 저자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무게추가 기울어 있던 나의 고정관념저울의 영점을 다시 맞추고 책을 읽어 나갔다.


저자는 곳곳에서 인간을 비틀고, 헤집고, 후려친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들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인간이 늑대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하고.



가벼운듯 묵직한 300p 남짓의 책을 읽고 나니,  저자가 늑대와 함께한 일상의 이야기부터 고대 신화, 깊은 철학적 사색까지 아우르며 수시로 얼굴을 바꿔가며 녹여 낸 방대한 양의 울림을 옮겨 담기에는 내 그릇은 간장종지만큼이나 작았다. 철학에 문외한인 나는, 저자가 풀어내는 논리와 사유를 평가할 깜도, 제대로 흡수하고 있는 지를 판단할 재주도 없었다. 그저 끄덕거리기도 하고 갸웃하기도 하고 설득도 당했다. 

그 때마다 책 구석구석 되새길 곳을 북마크를 하고 보니, 책 옆구리는 알록달록 색동옷을 입고 말았다.  


그리고 가벼운 독자인 나는, 언제나 나를 묵직하게 했던 화두를 떠올렸다.


“나의 미래는 불투명하고, 과거는 후회투성이이며, 오늘은 아프다. 그래서 나는 늘 행복하지 않다.”

 

이것에 대한 답도 갈색 늑대가 줄 수 있을까?

이 책의 후반부에서 나름의 힌트를 찾을 수 있었다.

그 흔적을 어떠한 기준 없이, 제멋대로 흘러간 나의 의식의 흐름대로 물 흘러가는 대로 구불구불 따라가본다. 이 글은 그런 글이다.





철학자와 늑대 <제 6장> 표지.



행복이란 게 토끼보다 좋은거야?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고 한다. 그리고 마치 행복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저자의 표현대로)행복에 중독된 세상에 살고 있다. 행복을 파는 자본이 등장하고, 온갖 책이며 매체에 이런저런 행복법들이 넘쳐난다. 세상은 끊임없이 행복하냐고 묻고, 그 답을 찾기 위해 ‘나는 행복한가?’를 끝없이 자문한다. 그리고 행복하지 않음에 늘 좌절하고 슬퍼했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랬다.



아마 누군가는 브레닌이 토끼를 잡았을 때에만 행복했을 거라 말할 것이다. 나는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브레닌은 토끼를 방은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브레닌의 행동은 토끼를 잡았을 때만 행복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사냥이 끝나면 성공했든 실패했든 눈을 빛내며 나를 향해 껑충껑충 뛰어와 달려들었다. 이 것은 녀석이 기쁠 때 하는 행동이므로 행복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브레닌의 행복은 토끼를 턱으로 물었을 때 느끼는 즐거움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  

215p.
나 역시 삶 속에서 감정이 아니라 토끼를 쫒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삶에서 가장 좋은 순간, 우리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은 순간은 즐거운 동시에 몹시 즐겁지 않다. 행복은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221p.


저자는 토끼를 쫒는 늑대의 이야기를 통해 행복에 대한 고정관념과 본질을 흔들어 놓았다. 우리는 늘 감정을 쫓으며 지금 행복한 것인가? 이런 감정이 행복한가? 그렇다면 언제인가?를 끊임없이 되묻고 확인하기 바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의 달달함, 원하는 일이 잘 됐을때 느낀 기쁨, 환희, 그 감정이 행복의 실체라고 믿었는데, 저자는 그 생각을 흔들어 놓았다. 행복은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늑대가 그러하듯. 

생각이 많아졌다. 그러나 단번에 끊어지는 생각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 집착해 온  생각이 그렇게 쉽게 툭, 뜮어질리가 없었다. 또한 행복에 대한 집착의 연장선에서 나는 늘 선택의 정당성을 찾아야 했다. 감정이든 존재이든 나는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 행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내 선택은 지옥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고 정당화했다. 여전히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해 주었으면 하는 대로 브레닌에게 해 주겠다는, 고상해 보이는 이 원칙은 단순히 내가 준비되지 않았음을 가리기 위한 가면이었다. 나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누가 알겠는가? 진정한 의도라는 게 있기나 한가?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알게 뭔가?(...중략)
결과는 우리가 포기해도 천벌을 내리고, 포기하지 않아도 우리를 지옥에 떨어트린다.
244p.


사랑은 때때로 아프다. 사랑 때문에 영원히 저주받을 수도 있다. 사랑은 당신을 지옥에 떨어뜨릴 것이다. 하지만 운이 좋으면 정말 행운을 만난다면 사랑은 당신을 지옥 에서 건져내 줄 것이다.
250p.


사랑이고 뭐고, 다 남의 이야기다.

나는 늘 불안했고, 지금도 별 볼일이 없고, 더구나 내 미래는 동굴 안에 갇혀있는 것처럼 축축하고 어두운데, 무슨 사랑타령인가? 당장 내일이 어떤 꼴인지 모르는 데 말이다. 이렇게 조잘거리면서도, 나는 미래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한다. 돌아보면 후회투성이 삶이었지만, 그래도 혹시 <조금 나은 미래>를 가질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래서 차마 놓지 못했다. 그 부여잡은 미련과 불안에 대한 답을 혹시 찾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나의 애정은 변하지 않았다. 니나는 브레닌과  한 시간 이상 떨어져 있다 재회할 때면, 반갑게 코끝을 핥았다. 
그래서 브레닌의 주검을 본 니나의 반응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니나는 형식적으로 브레닌의 냄새를 한번 맡더니 바로 고개를 돌려 더 흥미로운 상대인 테스와 장난치기에 열중했다. 브레닌은 더 이상 그곳에 없는 것이었다. 나는 니나가 그 사실을 이해했음을 감으로 알았다. 또한 니나는 브레닌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란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도 알았다.
281p.


내가 매일 아침마다 팽오쇼콜라를 3등분할 때 녀석들의 표정을 보았어야 한다. 기대감에 온몸을 떨고, 침이 강물처럼 샘솟고, 고통스러우리만큼 온 힘을 다해 집중하고 있는 모습 말이다. 그것은 지금부터 영원까지 오직 팽오쇼콜라만 먹는다고 해도 행복할 표정이었다. 그들의 턱관절이 팽오쇼콜라를 씹고 있을 때는 그 순간 자체로 완벽한 것이다.  (....중략)
인간에게 순간만으로 완전한 그런 순간이란 없다. 인간의 모든 순간들은 불순물이 첨가되어 있다.
283p.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과거나 오지도 않을 미래에 대해 고민하느라 말도 안 되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스꽝스럽게도 우리는 기억된 과거나 욕망하는 미래를  현재라고 부른다. 시간의 피조물은 순간의 피조물과 달리 노리로제에 걸린다.(....중략)
오직 인간만이 이 고통에 지배받을 만큼 충분히 과거와 미래 속에서 살고 있다
306p.


저자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의 차이로 설명한다. 인간의 시간은 끝을 향해 달려가는 직선, 동물(본문에서 예로 든 개 ‘니나’)의 시간은 둥글게 원을 그리는 곡선이다. 나아가 인간은 시간의 피조물로, 동물은 순간의 피조물로 보았다. 그리고 인간이 집착하는 ‘직선’의 시간에 대해, 그렇게 관념화 된 과거와, 미래, 그를 통해 사라져 버리는 순수한 현재에 대해 역설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같은 일을 반복하는 형벌을 받은 시지푸스 신화를 비틀어 봄으로서 우리가 옳다고 믿고 있는 성과, 과업, 성공과 그로 인한 행복에 물음표를 던졌다. ‘직선의 시간 안에서 우리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라고. 


한편 반복되는 원형의 시간 안에 존재하는 동물에게 있어 '행복'은 항상 똑같은 것이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예를 들자면, 암에 걸려 죽어가는 동안에도 동물은 아픈 순간은 아픔을 그대로, 아프지 않은 순간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때 그때의 순간을 맞하는 대신 인간은 ‘내가 아프다’라는 인식에 사로잡혀 주어진 모든 순간을 ‘아픈 시간’이라는 직선의 틀에 가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의 인식에서 '다시오지 못할 순간들'이 산재하고, 미래는 불안하고, 그래서 행복은 멀기만 한 무엇이라는 것이다.


음,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기는 한데, 마냥 늑대 ‘브레닌’이나 개 ‘니나’처럼 매일 같은 음식을 먹는 것, 순간마다 아픔과 아프지 않음을 구별해 가면서 반복되는 모든 순간을 매번 행복하게 받아들일까? 아니, 우선 인간이 그렇게 주는 대로 먹기만 하면서 ‘팔자 좋게’ 살 수는 있는 거야? 라는 삐딱함이 스물스물 올라왔다. 


순간에 충실하라는 피상적인 설교를 되풀이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라고 권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살면서 만나는 몇몇 순간들, 이 특정한 순간의 그림자 속에서 우리는 삶에서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깨닫게 괸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이 순간들이 인생 최고의 순간인 것이다.
320p.


결론적으로 나는 한 때 늑대였다. 나는 시간의 피조물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시작하는 지점과 끝나는 지점이 아니라 마치 수확기의 흩어진 보리 낟알처럼 삶의 전반에 걸쳐 흩어져 있는 그 최고의 순간들만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
332p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저자는 최고의 순간들만이 의미있다고 말하고 있다.

나머지는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나의 몫이다.



몇 주 동안 드문드문 읽던 책을 작심하고 앉아서 기어이 마지막 장을 읽어내고 나니, 새벽이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난 지금, 이 글을 정리하면서 구절구절을 되새겨보았다. 앞서 언급했듯 내 철학적 지식은 짧았고, 문외한의 한계는 분명했다. 따라서 책장 마다 미처 소화시키지 못한 부분들이 듬성듬성 날것으로 남아있다. 아주 단순하게 어느 부분에는 무릎을 치며 공감했고, 어느 부분은 갸웃거리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니 이 글은 그저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본 편협하고 초보적인 <독후감>이다.


저자의 사랑스런 늑대 브레닌의 이야기를 읽고 난 지금, 나는 엉뚱하게도 사람이 그립다.

매 순간, 미래 따위 겁낼 것 없이, 미련 따위 부여잡지 말고 순간을 사랑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인간의 한계다. 이 문장을 적으면서도 현재가 아닌 '사랑하고 싶다'는 미래를 희망하니 말이다.


역시 늑대가 한 수 위다.




나는 지금, 2013년에 선물 받은 책을 이제야 읽은 주제에, 순간과 사람을 논하고 앉아있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그들이 형성하도록 도와준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가끔 기억할 가치가 없는 이도 있다. 그럴 경우 가장 중요한 실존적 과제는 우리의 삶에서 그들의 기억을 삭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할 가치가 있는 이들이라면, 그들이 만들어 준 삶의 모습으로 사는 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그들을 존경하는 방법이다.


나는 언제나 나의 늑대 형제를 기억할 것이다.


<철학자와 늑대,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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