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oijak Oct 15. 2019

영화 '조커' : 이해하지만 공감하고 싶지 않은.

조커가 흥행을 이어간다고 하니 소위 ‘뽐뿌’가 왔다. 나도 봐야겠다 싶었다.

김 샐까봐 부러 영화평이나 관련 정보는 찾아보지 않았다.

계속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하는 일 없이 분주하다가 오늘 영화관을 찾았다.


솔직하고 정직하게 나는 영화평을 <아주> 못한다.

어떤 장면들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영화에서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지를 분석하고, 그 의도를 해석해서 어떠한 주관적 결론을 내리는 일을 전혀 못한다. 그냥 본다.

그래서 이 글은 영화평이라고 할 것도 없는 얄팍한 감상이다.




조커, 그는 비쩍 마르고, 등도 굽었고, 맞춤법도 틀리며, 그 나이 처(?) 먹고도 엄마와 같이 살고 있다.

코미디언이 되고 싶다는데 정작 재능은 없어 뵌다. ‘광대’ 조차 과분해 보인다.

마주하는 현실의 매순간 마다 그가 품었던 조각같은 희망은 보란듯이 박살난다.

진실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허깨비로 뭉개졌다.

잔혹한 살인의 순간에야 겨우 빛났다.


제멋대로 해석해 본다.

희망에 대한 강요, 도무지 나아지지 않고, 엉망진창인 삶 앞에서 그래도 ‘꿈’ 을 꾸며 살아가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한마디로 지린내 나는 고담시티 뒷골목 같은 인생, 그럼에도 삐뚤어지지 않아야 하는가?

이해한다. 너무나 이해한다. 


그런데 이해하지만, 공감하고 싶지 않다.

‘삶이 힘들다고 모두가 삐뚤어지는 것은 아니야.’ 라는 <꼰대질>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앞날이 안보이게 힘든데 <삐뚤어지지 말기>까지 하는 건 어디서 나온 잔인한 고문인가?


불타는 도심, 약탈과 폭력, 조커에 열광는 무수히 많은 ‘광대’의 얼굴들.

그 안에 자리하고 있을 나를 본다.

그렇기에 묵직한 불편함이 밀려온다.


너를 이해하지만 나는 결코 공감하지 않겠다는 세찬 도리질에 머리가 잠시 어지럽다.

되도 않을 희망과 긍정에 대한 강요에 불을 지르고 싶으면서도, 나의 희망은 불에 타지 않기를 바라는 이율배반을 슬쩍 모른 척 하고 싶다.



영화관을 나서는데 조커가 말을 건네는 것 같다.


“너무 마음 두지 마. 나는 그저 광대일 뿐이야.”




매거진의 이전글 그 남자와 이사도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