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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Nov 21. 2019

오늘도 글을 쓰다가: 나의 시선은 어디에 닿아있는가.

해질 무렵 노상 주차장에 주차를 하자, 노년의 주차 관리인이 다가온다. 그 분은 나에게 '얼마나 있다가 오실 것이냐' 물었고, 보통 1시간이면 끝날 일이라서 1시간 정도 걸린다고 대답했다. 관리인은 그러면 그냥 천원만 주고 가라고 하신다. 겨울이라 날이 추워서 일찍 퇴근하고 싶으셨나보다. 그러나 나는 일이 끝나면 그곳에서 당일에만 사용 가능한 주차권을 받아 올 것이기에 괜한 돈 1000원을 쓰게 되는 것이 아까워서 그냥 1시간 후에 주차권을 받아 오겠다고 했다. 주차관리인은 못내 아쉬워 하면서도 그렇게 하라고 하고는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그날 따라 예상보다 일이 늦게 끝나서 두 시간이 되어서야 주차장으로 되돌아왔다. 받아온 무료 주차권을 제하고도 1000원 쯤 더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봐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주차장 운영시간이 끝나는 8시를 넘기지는 않았는데 추운 날씨에 관리인들이 그냥 퇴근을 해 버린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그냥 돌아왔다. 


며칠 후 다시 그 주차장에 주차를 할 일이 있었고, 그때의 사정을 설명하고 당일 주차비와 함께 차 안에 보관해 두었던 며칠 전에 받은 주차권에 1000원을 더해서 주차비를 지불했다. 관리인은 기분이 좋았는지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는다.


“일부러 나중에 주고 가는 분은 별로 없는데, 참 양심 있는 분이시네.”


이것이 재작년 겨울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10여 년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20대 후반의 내가 또 다른 노상 주차장에서 관리인과 언성을 높이고 있다.


“아니, 누가 떼먹어요? 왜 자꾸 전화를 해서 독촉이신데요? 볼일이 끝나야 올 것 아니에요?”


그때 나는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고 있었고, 미용실 헤어디자이너의 립 서비스에 한껏 고무 된 상태로 차마 거절을 못한 채 온갖 시술을 추가하느라 시간도 예산도 한껏 오버된 터였다. 그러는 사이 주차장 마감시간을 넘기자 차 앞의 전화번호를 보고 관리인이 내내 전화를 했을 것이다. 라커에 보관 중이던 핸드폰은 수 없이 전화벨이 울렸겠지만 나는 받을 리가 없었다. 일부러 무시한다고 생각했을까? 그 때 부재중 전화는 열통이 넘었다. 


밤 9시가 다 되서야 주차장에 도착한 나를 맞은 건 그 시간 까지 기다린 주차 관리인 아주머니와 아저씨였다. 마감시간이 되어도 전화도 받지 않고, 나타나지 않는 나를 기다리느라 짜증도 났을 테고 일정 부분은 오기가 작동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보니 퉁명스럽게 나를 맞았고, 결국 서로 감정이 담긴 말들이 오고 가게 되었다. 그렇게 감정싸움을 하다가 이제는 내 억지가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한 대 더 댈 공간을 마련하느라 자꾸 나를 주차라인도 아닌 쪽으로 유도했던 것, 마치 떼어먹을 사람 취급하듯 열 몇 통 전화를 하고 나타나자마자 왜 이제야 오냐고 다그친 것 등등 나는 그들의 ‘잘못’을 꼬투리잡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서로간의 감정섞인 언사가 몇 차례 오간 뒤에 아주머니의 '그래요. 미안하네요.' 라는 사과로 언쟁은 끝났고 나는 운영시간인 8시까지의 주차비 4000원을 지불했다. 9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다시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내내 나에게 전화를 걸었던 아주머니 번호였다. 서로 헤어진 지 채 20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내 번호가 뜨니 아주머니는 지레 어떤 짐작을 하셨는지 받지 않으셨고, 몇 번 벨이 울린 다음에야 아저씨가 전화를 받으셨다. 아마 두 분이 부부셨나 보다. ‘여보세요.’ 도 아니고 ‘예.’ 라는 짧은 한마디 안에는 단번에 긴장이 훅.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난데없는 내 사과에 아저씨는 당황하신 듯 했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기다리셨고, 저는 주차비만 드리고 오면 될 일인데 괜히 꼬투리를 잡고 날카롭게 감정을 세워서 마음 상하시게 했다. 변명할 것 없이 제가 나빴다’라고 했다.

아저씨는 뒤늦은 나의 사과에 고맙다는 말로 기꺼이 사과를 받아 주었고, 아주머니께도 전해줄 테니 너무 마음 쓰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끝내 고맙다는 말을 덧붙이셨다.


그러나 미숙할 지언정 솔직하고, 진솔한 것 같은 나의 사과는 내 마음 편하자고 위선을 떤 것이다. 진짜 진실은 말하지 못했으니까.


이런저런 꼬투리를 잡아대면서 두 분을 몰아세운 것은 나의 비열함을 감추고자 상대의 허물을 들춰내는 못 배워먹은 저열함이었다. 

알음알음 전해지는 알뜰한 ‘꿀팁’ 처럼 당시 내 친구들 사이에는 차라리 8시를 넘기면 주차비를 안내도 된다는 속설이 퍼져있었다.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한 친구가 있었고, 누구하나 문제 삼지 않았다. 운이 좋다고 생각할 뿐. 

미용실 시계가 슬슬 8시를 넘어갈 때, 나는 은근히 그 꿀팁을 떠올리며 무료주차를 기대했을 것이다. 내 예산 한도를 훌쩍 넘기는, 원치도 않는 시술을 ‘쪽팔려서’ 거절 한마디 못하고 주렁주렁 매달고는 이 정도는 무리가 아니라는 듯 도도한 척 일시불로 카드를 긁고 미용실을 나왔다. 그리고 8시까지의 주차비를 받으려고 한 평 남짓한 주차부스 안에서 1시간을 기다린 내 부모뻘 아저씨, 아줌마에게 ‘원칙’과 ‘예의’를 나불거렸던 것이다. 은근한 편법으로 공짜를 기대했던 주차비 4000원이 아까워서.


그렇게 비열했던 나를 마주하고 끝내 입에 발린 사과로 얄팍한 마음의 면죄부를 준 나는, 그 면죄부의 무게감 때문에 주차 관리인이 없어서 그냥 갔던, 며칠이 지난 주차비까지 정확하게 계산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뒤통수 뜨거운 부채의식이 남아있어서이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 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바탕이 선한 사람이다.

그것까지 괜한 겸손을, 혹은 위악을 떨고 싶지는 않다.

다만, 어느 시절 나의 한 토막은 마음껏 비열했다.

내 안에 자리 잡은 그만큼의 비열함을 마주하고 나서 '옳음'에 대한 나의 시선은 그렇게 옮겨가고 있었다.


전에 한 번 ‘자신이 정말 모르는 게 뭐가 있느냐?’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재벌의 기분? 기득권의 기분?’ 이라고 대답했었다.

재벌? 그건 죽을 때 까지 모를 것이다. 그러나 기득권? 어쩌면 나는 나도 모르는 새 사소한 기득권을 움켜쥐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건방진 줄도 모르고.





오늘도 글을 쓰는데 뭔가 잘 풀리지 않는다. 이런저런 생각이 꼬물꼬물 올라왔다.


내가 창조해 내는 인물들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

결국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이 내가 바라보는 세상이고 그들의 시선이 나의 시선일 것이다.

글 안의 인물이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는 것은 결국 나의 흔들림이구나. 


너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 거야?

옳다고 믿는 곳을 향해 고개 빳빳하게 들고 당당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 맞아?

쭈뼛 거리면서 눈치 보지는 않아?

괜히 이것저것 ‘척’ 하고 있는 건 아니지?


그렇게 하나하나 물어가며 길을 찾아 더듬더듬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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