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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Nov 24. 2019

우울요정은 왜 괜찮아요정이 되었을까?

알아서 살고 있어요.

대학 1학년 때, 소개팅을 했었다.


햇살 좋은 낮, 학교 앞 커피숍(그러하다. 나는 ‘카페’라는 이름보다는 ‘커피숍’ 이라는 이름이 익숙한 세대다.)에서 공대 남학생을 만났었다.

그는 내가 너무 잘 웃고 밝아서 좋다고 했다. 유쾌하다나?


음, 그랬을 것이다. 마침 그날이 우리 과 일일호프가 열린 날이었고, 나는 낮술로 이미 만취에 가까운 상태였다. 그러니 세상이 아름다워 보일 수밖에. 그러니 웃을 수밖에.

상대 여자가 소개팅에 술 취해서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던 공대 청년은 발그레 헤죽헤죽 웃는 여학생이 얼마나 밝아보였겠나.


'응, 아니야. 너 틀렸어. 몽총아.'




나는 우울요정이었다. 언제든 우울 보따리가 껍질을 쭉 찢고 나와 암흑의 기운으로 주변을 물들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멘탈이 강한편도 아니었고, 감정에 잘 휩쓸리기도 하고, 슬픔에 잠식 당해 땅굴을 파고 바닥까지 들어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것 뿐. 나는 누구든 내 우울을 나눠가져 주기를 바란 적이 없다

아프니까 아프다고 했을 뿐이고, 우울해서 우울하다고 했을 뿐이다.

그런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나의 우울을 목도한 가까운 이들이 힘들어 하기 시작한다.

고마운 일이다. 나에게 마음을 나눠준 것이고, 그 마음으로 뭔가를 해결해 주고 싶었을 테니까.

허나 우울이든 아픔이든 내 몫은 내가 아니면 누구도 해결 할 수가 없었다.

내가 해결 할 준비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나아지기를 바랐던 이들이 지쳐갔다. 

그게 미안하고 마음 아파서 해명을 해보기도 하고, 설명을 해보기도 했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내 몫이 아니었다. 나와 그들의 속도는 많이 달랐으니.


우울요정은 괜찮아 요정이 되기로 했다.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는 되도록 곁을 주지 않았으며, 과장되게 괜찮은 모습만 보이려했다.

이를테면 술을 마시고 해맑고 발랄하게 분위기를 이끄는 등등의 제법 '괜찮은' 것들.

소개팅 그 청년이 반했다던 까르르 웃음 같은 것.


그래도 슬그머니 우울이 드러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또한 아무리 괜찮아 요정이라도 사람인지라 슬쩍 기대고 싶어지지 않을 수가 있겠나?

그래서 스스로 생각할 때 마음 안에 기댈 언덕이 생긴다 싶으면 잠수를 타버리거나, 언덕을 부숴버렸다. 


힘들어서 어찌 버티느냐고?

지금처럼 만천하에 쩌렁쩌렁 일기를 쓰거나, 창작물 안에서 사이코 패스 주인공을 만들어서 살인을 하기도 하고, 불륜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런 짓(?)을 하다보면 내 인격이 바뀌는 기분이라 우울 따위 깜박 잊어버렸다.


우울요정이 괜찮아 요정이 되는 동안 혼자 할 수 있는 일들도 많아졌다. 다분히 의식적으로 누군가에게 빚을 지거나 의지하지 않으려 하다 보니 마음은 물론 일상도 알아서 혼자 '잘' 하게 된 것이다.

나는 형광등 정도는 거리낌 없이 혼자 갈고, 어지간한 전자제품은 굳이 매뉴얼을 찾아보지 않아도 알아서 쓸 수 있다. 이거 누르면 되겠지? 하면 되더라.

아, 내 방의 조립식 책상은 드라이버 하나 들고, 육각렌치로 조여가면서 혼자 조립했다. 볼 때 마다 뿌듯하다. 네비게이션도 없던 초보운전 시절에 차선을 못 바꿔서 외곽도로를 타고 나갔다가 어두운 밤에 길을 잃고 울기 직전에야 어느 파출소에 들어가 길 좀 알려달라고 해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살면서 길을 잃거나 나사 하나가 빠져버리는 일은 흔하게 있었지만 그냥 ‘알아서’ 살고 있다. 가능한 기대하지 않으면서. 그럼에도 구비구비 곁을 내 준 인연들, 그 시절을 채운 사람, 공간이 있었으니 내 길 위에서 혼자였을 뿐, 나를 채운 공기가 외롭지는 않았다.

그렇게 우울요정은 괜찮아 요정의 자리가 익숙해지고 있었다.




집에서 나오려는데, 식탁 위에 핸드폰을 놓고 왔다. 가방을 주렁주렁 들고 핸드폰을 집다가 각도가 좀 안 맞은 모양이다. ‘으억!’ 비명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마침 설거지를 하던 엄마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 더하기 ‘도대체 어쩌라고?’ 하는 묵직한 걱정 더하기 얼마 쯤은 짜증을 담아 나를 돌아본다.

욱...참고 있던 것이 치밀어 오른다. 늙은 엄마와 다퉈봤자 결론은 패륜이니 '아닥'하고 퇴각이다.


이미 노년의 가운데에 접어든 엄마의 걱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갑자기 밀어닥치는 통증 때문에 튀어나오는 불시의 비명(?)소리를 엄마를 의식해서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발, 그냥 아파서 소리를 낸 것뿐이니 당신 머릿속의 온갖 상념을 죄다 소환해서 내 앞에서 죽을 듯 울상을 짓지 말아라. 어쩌라는 것이 아니다.


그냥, 그 순간이 아팠을 뿐이라고.

우울한 날이 있겠지만 그냥 우울한 것 뿐이라고.


앞으로도 괜찮아 요정은 괜찮게 살 것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그래서 그런지 우울요정이었다가 괜찮아 요정으로 사는 나는 '위로'가 어렵다.

그들도 나처럼 아프니까 아프다고 했을 뿐인데, 어쩌라고 위로를 건네겠는가 싶어서.

다만 ‘그래요. 아프시군요.’ 하고 슬쩍 이해 할 뿐이다.

다들 오늘의 나처럼 아파서 비명이 튀어나오는 날도 있지 않겠는가.


염병할 통증.


괜찮아. 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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