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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 '일절'의 시대.

by choijak


둘째 이모는 대학교 정문 앞에서 분식집을 했었다.

간판만 ‘분식’이지 실은 생맥주, 소주, 막걸리의 주류와 안주를 파는 술집이었다.

이모의 가게와 나란히 이웃한 온갖 ‘분식’집들의 사정 또한 다들 비슷해서 모두가 <술파는 분식집>이었다. 그들 가게의 출입문은 공동구매라도 한 것마냥 모두가 같은 형태의 알루미늄 프레임의 유리 미닫이문이었고 그 문짝은 싼티 나는 얇은 선팅지로 최종 마감이 되어있었다. 문짝을 가리는 초록이나 빨간색 선팅지 위에는 하얀색이거나 검정색 선팅지로 ‘생맥주’ ‘소주’ ‘막걸리’라는 글자가 단호한 궁서체로 새겨져 있었고, 그와 대칭을 이루는 곳에는 반드시 ‘안주 일절’이 새겨져 있었다.


같은 모양을 가진 한자어 '一切'는 의 '전혀 ~하지 않는다.' 의 뜻을 가질때는'일절'로, '모두' 혹은 '전부'를 뜻할 때는 '일체'라 읽는다. 그러니 이 경우, 문법적으로 ‘안주 일체' 라고 써야 하지만 그 시절 대부분의 술집 문짝에는 ‘안주 일절’이라는 잘못 쓴 글자가 당당하게 박혀있었다.


모양은 같으나 음이 다른 이 한자어는 어느 어설픈 한량이 제가 드나들던 선술집 마담에게 한껏 잘난 체를 하느라 휘갈겨 써 준 메뉴판이 시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모가 학교 앞에 가게를 열기 훨씬 전, 내가 아주 어릴 적에 아빠가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면 기어코 따라가서 빈대떡 한 조각을 얻어먹었던 그때, 동네 어귀 술집의 나무 프레임 유리문짝에도 페인트 붓글씨로 ‘안주 일절’이 적혀 있었으니 이 ‘안주 일절’의 역사는 제법 유서 깊은 것이다.


그 흔적은 이모의 가게가 그 자리에 있던 1980년대의 끝자락에도 닿아있었다.





당시 초등학생(국민 학생)이던 나는 방학이면 나 혼자 기차를 타고 타지에 있는 이모의 가게에 놀러 갔었다. 가게 안쪽 주방 옆으로 작은 쪽방이 있었고 그 방에서 이모는 혼자 살았다. 입으로는 귀찮게 왜 또 왔냐고 싫은 소리를 하면서도 학교가 방학이라 손님도 없는 이모의 ‘술 파는 분식집’ 주방에는 연신 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시장에서 새 옷도 사주고, 엄마라면 딱 한 개만 고르라며 잔소리를 퍼 부을 머리핀이며 각종 머리 방울을 양껏 사주었다.

그리고 길만 건너면 만날 수 있는 대학교의 잔디밭은 심심한 국민학생의 저혼자 놀이터였다. 스케치북을 들고 나가 그림을 그리거나 넓은 교정 이곳저곳을 기웃기웃 구경하고 다녔다. 가끔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간식을 나눠주거나 말을 걸어오면 수줍어서 쪼르륵 도망가곤 했다.

(나중에 내가 그 학교를 다닐 줄은 생각도 못했으니 대 선배님을 알아볼 리 있겠는가.)


그리고 그 즈음 책만 보면 닥치는 대로 읽었던 나는 이모의 가게에 있는 온갖 책들을 마구잡이로 읽어댔다. 대부분이 독립해서 나간 사촌 언니가 남겨두고 간 책으로 여성잡지부터 소설책까지 읽을거리는 넘쳐났으며 그것들은 모두 내 밥이 되었다. 그러는 중에 여성잡지 한 권을 집어 들었고 기사 하나를 읽었다. 무슨 소리인지 절반은 알아 먹지도 못할 이야기였는데 읽다보니 얼굴이 훅 달아오르고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무슨 야한 소설이라도 읽은 것인가 싶겠지만 그 기사의 주제는 ‘부천 성고문 사건’이었다.


기사는 수기 형태로 기록되어 있으며 굉장히 세세한 묘사 때문에 장면 장면이 눈 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갈 때마다 생전 본 적도 없는 경찰 문모씨가 산더미 같은 몸으로 내 앞에 떡 버티고 서 있는 것 같았다.


성교육이라고 해 봐야 고작 정자가 어떻고 난자가 어떻고 생리주기는 어떻고 하는 원론적인 이야기에 어설픈 그래픽으로 정자가 뾰로롱~ 헤엄쳐 가서 난자에 뿅! 하고 닿는 수준의 '임신' 과 '생식'에 초점을 맞춘 성교육이 전부였다. 그 마저도 여학생들만 따로 모아놓고 앞서 말한 임신과정을 열심히 설명해 놓고, 그러한 임신은 여성만이 가지는 고결한 것이므로 나이를 먹어 결혼을 하기 전에는 절대로 함부로 '몸' 을 열어서는 안된다는 ‘여성의 순결’을 주입하던 시절이었다. tv 에서는 단정하고 공부잘하던 여학생이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밤 늦게 돌아오다가 공사장에서 불량배들에게 성폭행을 당해 임신을 하고, 가난한 집안에 울며 겨자먹기로 시집을 갔다가 시집살이를 못 견디고 뛰쳐나와 화류계를 전전하다 돈많고 나이 든 영감님의 첩살이를 하며 씁쓸한 얼굴로 담배를 무는 내용의 드라마가 나왔다.

그때의 여성의 성은 잘못 꼬이면 '한방에 팔자 조지는'것이었다.


그런 성의식이 전부였던 시골 국민학생에게 잡지 안의 내용은 사안의 심각성과는 별개로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 그 어린 마음에 글 안에 등장하는 범죄 피해자 대학생 언니는 졸지에 ‘몸 버린’ 여자가 된 것이다.




이제 생각해 보니 당시 여성잡지에서 다룬 ‘수기’ 형태의 기사가 과연 실제 수기였는지, 혹은 누군가의 손을 거쳐 말초적이며 자극적으로 ‘깔쌈’하게 양념칠 해서 쓰여진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잡지의 편집 방향은 매우 경솔하고 가벼웠다. 내가 분명히 기억하는데 그 기사의 다음 기사는 무려 <첫날밤 에티켓>이었다.


‘초야에는 센스있게 배스타월(영어를 한글로 옮겨놨으니 국민학생은 이게 뭔지도 몰랐다.)을 준비해서 신랑에게 사랑받도록 하자.’

‘신랑이 “이건 왜 까는 거지?”라고 물으면 “엄마가 그렇게 하는 거라고 했어요. 호호호.” 라고 대답한다. 당신은 사랑받는 신부가 될 것이다.’


나의 쓸데없이 좋은 기억력 덕에 성우가 더빙한 ‘방화’에나 나올법한 대사톤으로 저 지랄맞은 것들을 다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 때 나를 충격의 도가니에 빠트렸던 기사의 주인공은 이후에도 어떤 순간마다 세상에 이름을 올렸다. 대학 때 여성학 강의를 들었을 때도, 어느 변호사의 부고 기사에도, 성폭력 사건이 있을 때마다, 그리고 최근 정치의 영역에서.


그가 꺼내놓은 이야기는 지금의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갈등과 압박을 견딘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더구나 경찰이라는 국가 권력에 의한 범죄의 피해자였는데도 피해 사실에 집중하기보다는 (내가 읽은 잡지가 그러했듯)한올 한올 말초적인 호기심의 대상으로 소비되고, 짙은 색안경 너머의 시선앞에 외롭게 홀로 서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알려야 했으므로 알렸을 것이다.





요즘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 ‘페미’는 믿고 거르는 1순위라고 한다. '페미니스트'에 대한 이미지가 지극히 급진적인 이들의 모습으로 굳어진 탓일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10대, 20대 혹은 30대 초반의 젊은 남성들이 느낄 상실감도 이해한다. 역차별 이야기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여성’이라고 해서 무조건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나간 시절의 업보를 현재의 세대에게 갚으라 하는 것은 과하다. 물론 세세히 뜯어보면 여전히 자리한 성차별요소는 분명히 있으나 그것은 사회가 함께 해결할 일이지 성별로 나뉘어져 대립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또한 나는 모든 차별과 폭력은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존중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만 ‘약자’의 자리에 여성이 놓여있던 시간이 길었던 탓에 나 역시 오랜 시간 누적된 그 차별과 불합리의 연장선상에서 겪었던 경험을 안고 있으니 여성의 입장을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즉, 내가 아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조심스럽다.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살아오면서 겪었던 일들이 흘러간 ‘라떼’ 타령 한자락일까. 피해자 코스프레는 지겹다고 욕을 먹을까?


중학교 때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에서 고등학생이 가슴을 쥐고 도망가거나.

버스에서 잠들었는데 옆자리 할아버지가 내 팔뚝에 자기 팔뚝을 비벼대며 흐뭇해하거나.

처음 보는 아저씨가 버스 정류장에서 양손에 풍선을 들고 조물락 거리면서 ‘아가씨들 유방같아. 말랑말랑 한 게’라고 나와 친구들을 향해 주절대거나.

공중전화 부스 앞에 각그랜져(차종도 기억한다)장기 주차 해놓고, 전화 부스에 여자만 들어가면 갑자기 자위를 시작하는 꾸준하게 성실한 변태를 만나거나.

교사가 수업 중에 바지춤을 끌어올리다가 “아, 이러면 뭐 툭 튀어나와.” 라며 자신은 격의 없는 선생인 줄 알고 히히거린다거나.

......등등등.


그럼에도 ‘이만한 것만 겪어서 다행이야.’ 라고 친구들끼리 당연하게 이야기하며 살았다.


내 허벅지 위에 지 손을 얹어놓고 계속 떠들던 나이 든 남자를 향해 공개적으로 “저기, 당신 손 감각이 둔해서 착각한 거 같은데 지금 손 얹어놓고 있는 그거 내 허벅지거든요? 그 손 좀 치우실까?”라고 거침없이 말 할 수 있게 된 건 내가 서른이 다 되어서였다.


그제야 그래도 되는 세상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성을 폭력의 대상으로 삼고, 그것이 피해자를 죄인으로 만들었던 시간, 그것이 ‘팔자 조지는’ 줄 알고 침묵하고 끌려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조금씩 세상이 변했다. 성에 대한 담론은 자유로워지고 개인의 성적 자기 결정권은 전보다 꼿꼿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약자는 있으며 약자를 괴롭히는 방법은 더더욱 교묘해졌다. 전에 비해 자유로워진 성에 대한 담론을 비뚤어진 시각을 바탕으로 의도적으로 오기(誤記)해서 변태적 가학행위를 피해자들의 ‘개인의 선택’ 혹은 ‘성에 대해 쿨한 것’으로 포장하거나 가벼운 '호기심'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가벼워져야 할 것은 피해자의 불필요한 죄책감이지 다양한 형태로 변주된 범죄행위가 아닐 것인데.


다시 한번 말 하지만 성별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의 문제이고 인간에 대한 존중의 문제이다. 남자는 그래도 된다며 남성의 엉덩이를 툭툭 친다거나, 남성의 성은 거침없는 농담의 주제가 된다거나, 남자는 다 좋아하지 않냐며 몸을 만지작거린다거나 하는 것 역시 명백한 성희롱이자 폭력이다. 빈도의 차이, 행위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 '그래도 되는 것'이 될 수는 없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는 ‘이정도만 겪은 게 다행이야.’ 하던 그 시절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또한 지금도 내가 보지 못한 곳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지 모르는 일이다.

그 시절, 우리가 모르던 곳, 어느 경찰서 안에서 벌어진 일들처럼.


명백하게 틀린 이름, ‘안주 일절’의 시대는 끝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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