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에 대하여.
스토리의 힘은 갈등에서 나온다. 잘 만든 스토리는 얼마나 극한의 갈등을 부여하고, 그 갈등을 뛰어넘어 해결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소설, 영화, 드라마 등 장르 불문 ‘만든 이야기’ 라 칭하는 것들에게 모두 해당 되는 공통 요소이다. 인간이라는 종족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상상하기를 즐겼다. 그러니 갈등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오래전 이야기다. 표절시비가 일었다. 한 사람이 세상을 향해 말하기를 유명한 작가가 본인의 스토리를 표절해 세상에 내놓았다는 것이다. 설왕설래가 일었다. 흔하다면 흔한 일이다. 어딘가에 글을 투고했더니, 혹은 작품을 공모전에 냈더니 아이디어만 쏙 빼먹고 ‘팽당했다’는 이야기는 전설처럼, 혹은 당연한 수순처럼 잊을만 하면 술자리 단골 안주거리로 올라오던 이야기니까.
이런 일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일이 실재하거나, ‘써놓고 보니 로미오와 줄리엣이거나 춘향전’이라는, 즉 하늘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으며 사람 머릿속에서 나오는 스토리가 거기서 거기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잘’ 버무리느냐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 어느쪽이든 수긍할 만 하다. 이제 시시비비를 가릴 일이다.
당연하게 유명작가 측은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그런데 무수히 많은 ‘지망생’들이 문제를 제기했던 그를 비웃고 비난했다. 굳이 따지자면 유명작가 쪽 보다는 문제를 제기한 그쪽에 가까운 입장이었으며 비슷한 이야기들을 쏟아내며 울분을 토했던 이들이 자신들이었음에도. 그 이면에는 ‘내 손에 들어오지도 않은 기득권’이 있었다.
한 무명작가(그는 지망생도 아니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 작가 타이틀을 가진 이였다. )가 유명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문제제기는 시시비비를 가릴 일이지 누군가에게 비웃음을 살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첫 번째 가능성, 그러니까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많은 지망생들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정신 나간’ 무명작가 대신 ‘잘 나가는 유명작가’를 자신의 미래로 당연하게 생각한 것이다. 있지도 않은 기득권을 마치 내것 인 양 부여잡은 것이다. 조금 과장일지 모르지만 매 순간 우리는 우리와 닮은 이들의 목소리를 끝까지 듣기도 전에 배척한 것이다. 내 귓가에 울리는 내 목소리였을지도 모르는데도 그렇게 했다. 상대적 약자의 권리를 알아서 반납한 것이다. 문제제기 조차 웃음거리로 만들면서.
스토리에만 갈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의 전면에 깔린 갈등은 수시로 얼굴을 바꿔가며 사람들을 극한으로 내 몬다. 성별, 연령, 정치적 성향, 지역 등등... 따지고 들자면 갈등이 아닌 것이 없다.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보편적 갈등이 있다면 ‘돈’의 갈등이 아닐까 싶다. 가진자와 덜 가진자,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자. 그들의 보이고 보이지 않는 갈등이 삶을 지배한다.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앉은 이들은 이 갈등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다. 전지적 작가 시점의 서술자처럼 그저 바라보다 툭툭 참견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1인칭 주인공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절대 다수의 많은 이들은 매 순간 벌어지는 갈등 앞에서 이리저리 휘청인다.
최근 부동산 문제가 핫이슈였다. 많은 말들이 오갔으나 내가 본 가장 솔직하고 서늘한 반응은 ‘내가 앞으로 살 좋은 집값은 잡되 언젠가 팔게 될 내 집값은 올려달라.’ 는 것이었다. 대치동 모 아파트의 주민은 재건축의 조건으로 임대세대가 들어오는 것은 ‘질 떨어지는’ 일이라 했다. 많은 이들이 겉으로 분노하는 듯 하면서도 내심 아직 내가 사지도 않은 미래의 아파트가 내려가기라도 할까봐 슬그머니 곁눈질을 살피는 모양새를 보았다. 나의 사다리를 걷어찼다고 분노한다. 마음이 그쪽으로 가는 것이다. 미래의 나는 임대 아파트의 주민이 아니라 분양 아파트의 주민이라는 심정이다. 그러나 눈 앞에 펼쳐지는 현실은 그 끝에 닿기 요원한 치솟는 집값이다. 그 앞에서 묘한 양가감정에 시달리고 있다. ‘내가 저 집의 주인이 되었을 때’를 가정하면서 오늘도 내적 외적 갈등으로 바쁘다. 문득 아니라는 자각이 들면 깊은 상실과 허탈함이 먹구름처럼 밀려온다. 분노가 치밀기도 할 것이다. 넓은 자리에서 함께 사는 방법 보다는 어떻게든 밟고 올라서 나도 첨탑의 기득권이 되어야 한다는 조바심이 갈등의 물길을 지배한다.
물론, 이 분야의 문외한인 내가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성급한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가치를 배척할 필요는 없다. 돈이 나쁜 것도 아니고 있어서 싫을 사람 얼마나 되겠는가. 다만 모든 가치 위에 돈이 올라앉은 세상에서 나는 수시로 발밑으로 땅이 쑥 꺼지는 기분을 느낀다. 루저라서 그렇다.
여담이다만, 주말에 친구 결혼식에 다녀온 이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끝에 엄마가 철지난 새타령을 읊었다.
‘으이구, 남들은 다들 좋은 신랑 만나서....(이하생략)’
속으로 나도 새타령을 읊었다.
‘저기, 그 남들 중 누구는 아버지가 딸이 서른이 되기도 전에 딸 명의로 서울에 집을 사 주셨다오. 또 그 남들 중 누구는 어떻고...또 누구는 어땠고, 그들이 그만큼 평탄하게 사는 데는 그들의 노력도 있었으나 애초부터 시작점이 달랐다오. 그저 내 친구라고 다 나같은게 아니라오. 묘하게도 내 친구들의 '경제적 레베루'가 좀 높소. 내가 황새 무리의 뱁새요. 엄마, 그러니 그들의 신랑들을 손에서 놓친 떡인 양 한숨 쉬지 마시기를. 그들은 엄마의 딸을 만나지 않소.’
현실이다. 별로 슬프거나 씁쓸하지 않다. 세상이 무조건 일직선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치열한 갈등이 몰아치는 스토리라도 다양한 위치에 서 있는 이들이 각자의 삶을 저주하지 않는 세상, 그 정도의 가치는 지켜줬으면 좋겠다. 스토리의 엔딩은 그렇게 찍었으면 한다.
그리고...
내일이 엄마 생신이라 미역국을 끓일 참인데, 살짝 간을 쎄게 할까싶다. 짜거든 물 부어 드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