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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세 남성 백동주와 2834! 2834!

모두에게 같아야 하는 것.

by choijak

몇 해 전 잠이 덜 깬 아침, 휴대폰이 진동했다. 잠결에 전화를 받고 보니 낮게 깔린 낯선 남자의 단호한 음성이 들렸다.


- 최**씨죠?

- 네, 그런데요. 누구세요?

- 서울 중앙지검 김영식 수사관입니다.

- 네?

- 42세 남성, 백동주씨 아십니까?

- 그런 사람 모르는데요.

- 42세 남성 백동주는 **시 출신으로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금융범죄 용의자로 검거되었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최**씨의 통장이 농협은행 서울 역삼동 지점에서 사용된 것으로 파악되어서 관련해서 조사를 받으셔야 될 것 같습니다.

- 역삼동이요? 저는 근처에도 간 적 없는데요?

- 주민번호가 ******-******* 맞죠? 주소지는 OO시 XX아파트 맞습니까?

- 잘 안 들려서 그러는데 다시 한번만요.

- (엄, 근, 진, 언성 높아짐)최**씨! 이거 지금 중요한 문제에요. 주소가 OO시 XX아파트 맞냐구요!

- 네. 맞아요.

- 주소가 서울이 아니라서 큰 관련은 없을 것은 같은데 일단 사용이 됐으니까 조사는 받으셔야 될 것 같고, 잘못하면 최**씨가 처벌 받을 수도 있어요!

- 어...진짜 저는 서울 간 적도 없는데요. 그럼 어떻게 해야되죠?

- 일단 소환조사가 원칙인데 지방에 거주하시니까 온라인으로 조사를 받으실 수 있도록 페이지 링크를 불러 드릴거에요. 잘 따라오셔야 합니다. 지금 컴퓨터 앞에 계십니까?

- 네. 그런데 인터넷 접속하기 귀찮은데요.

- 최**씨! 나 지금 장난 하는 거 아닙니다

- 그냥 소환장 보내세요.

- 네?

- 검찰에서 부르시면 가야죠. 중앙지검이라고 하셨나요? 성함이?

- 김영식 수사관입니다.

- 알겠습니다. 소환장 보내시면 갈게요. 보내세요. 제 주소 아시죠?

- ........그럼, 저희가 소환장 보낼테니까 조사받으러 나오세요. 이거 장난 아닙니다.

- 네. 수고하십시오. 조사 때 뵐게요.


놀고 있네. 더 놀아주고 싶었는데 자다 깨서 화장실이 너무 가고 싶었다. 주소나 주민 번호나 전화번호가 이미 공공재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낯선 남자가 목소리 쫙 깔고 전화를 걸어서 주소, 주민번호, 전화번호를 읊어대며 금융거래 운운하면 그건 그냥 보이스피싱이지. 뭐. 볼 것도 없다. 다만 심심하던 차에 한껏 목소리에 힘을 주고 딴에는 자연스러운 ‘연기’톤으로 제법 ‘연기’를 하고 있는 그에게 나 역시 벌벌 떠는 연기를 하며 좀 놀아줬을 뿐이다. 연기력으로 보자면 내가 승. 내 겁먹은(사실은 겁먹은 ‘척’) 반응에 한껏 고무되어 연기에 힘이 들어가는 걸 보니 그쪽은 아직 멀었다. 김영식 수사관.




운전면허를 따고 2년 정도는 장롱에 모셔두다가 20대 중 후반에 허름한 중고차를 한 대 사서 타고 다녔다. 어느 시점에서 끼어들지를 몰라 무한 직진을 한다거나, 막다른 길인지도 모르고 논두렁길을 따라가다가 울면서 풀숲을 후진하고, 주차하다가 벽에 들이박아 번호판이 구겨지고, 마주 오는 버스가 무서워서 옆으로 바짝 붙다가 조수석 문짝 뜯어 먹고. 대충 그렇게 6개월쯤 타고 다니니 겁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제법 운전을 ‘잘’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현재는 운전에 잘 하고 못 하고가 없다는 주의이다. 운전이라는 것은 한 없이 조심해도 모자랄 게 없는, 1톤 이상의 쇳덩이를 끌고 사람들 사이로 나서는 무시무시한 일이라 생각 한다.) 아무튼 그쯤 되니 신호 바뀌기 직전에 속도를 높여 교차로를 질주하고, '왼손으로 핸들을 잡고, 조수석 등받이에 오른손을 걸치고 우웨엥~ 후진하는 것' 등등을 슬슬 시작하던 참이었다. 운전 병아리가 중닭이 되어 개똥멋도 부릴 줄 알게 된 것이다.


어느 날, 5거리에서 신호대기에 걸렸다. 오른쪽 뒤에는 경찰차가 반짝반짝 서 있고, 신호등은 빨간색. 모든 차가 정차중이었다. 나는 우회전을 할 것이라 그쪽으로 진행하는 차가 없음을 확인하고 방향지시등을 깜박깜박 켜고 시원하게 핸들을 꺾어 우회전을 시도했다. 무리없는 우회전, 속도를 높여 달리는데 뒤에서 불빛이 번쩍인다. 그리고 사이렌 소리! 괜히 주눅이 들지만 잘못한 건 없으니 그대로 달렸다.


- 2834! 정지하세요! 2834! 2834!


2834는 당시 내 차번호였다. 나를? 아니, 왜?

도로에 정지하니, 경찰관이 다가와 운전석 창문을 두드린다.


- 신호위반으로 과태료 처분 합니다. 면허증 주세요.

- 신호위반요? 우회전은 신호 안받아도 되는 거 아니에요?

- ......거기가 우회전이에요?

- ....오른쪽으로 굽었는데 우회전 아니에요?

- 하아......면허증 주세요.

- 네...(지갑에서 면허증을 꺼내서 건네기 직전)근데요. 선생님. 제가 드리긴 드릴건데요. 뭘 잘못했는지는 알려주셔야 다음부터 같은 짓을 안하죠.

- 신호 있는 오거리에서 직진차로 빨간불에 직진하셨어요. 길이 구부러졌다고 우회전이 아니에요.

- 몰랐어요. 죄송합니다. (울먹)

- (차 뒤에 붙은 진지한 궁서체 ‘초보운전’ 스티커를 확인 하고)후우...가세요. 어쩐지 겁도 없이 경찰차 앞에서 신호위반을 하더니...다음부턴 조심해요!

- 네! (명랑)감사합니다!!



zzzz.png 구체적 지명에 대한 보안으로 자체 모자이크- 출처: 다음 로드뷰.


당시 사건 현장의 실제 로드뷰이다. 사진상 하얀 트럭 위치가 내가 서 있던 곳이며 옆 차선에 경찰차가 있었다. 나는 사진 상 구부러진(!) 가운데 길로 시원하게 우회전(?)했다. 심지어 다시 보니 우회전 차선도 아니다. 나는 그 때 정말 몰랐다. 구부러진 길도 직진인 것을.




사람들은 농반 진반으로 운전 중에 경찰차만 보면 잘못한 것도 없이 긴장된다고 한다. 경찰차가 번쩍거리며 지나가면 괜히 주눅 들어 자세가 겸손(?)해 진다고 한다. 우리의 역사가 권위주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경찰, 그로 대표 상징되는 공권력이라는 존재는 늘 위압적이고 나보다 위에 자리한 특별한 존재로 각인된 탓일 것이다. 한 시절, 공권력은 처벌 혹은 나에게 벌어질 불이익을 최소화 하기 위해 ‘조공’을 바쳐야 하는 대상이었다. 어느 시절에는 도로 위에서 교통경찰의 단속에 걸리면 운전면허증 아래에 만원짜리 한 장을 깔아 건네는 것이 ‘보통’의 '센스 있는' 대응 이었다. 불법행위를 단속하러 나온 공무원의 주머니에 하얀 봉투를 찔러넣어 주는 것이 불법행위를 바로 잡는 것 보다 현명한 해결책으로 받아들여졌다. 무슨 일이 생기면 ‘빽’을 찾아 나서기 바빴다. 동네 이장부터, 경찰서 누구, 시청 공무원까지 공공의 이름은 ‘빽’이 되고 ‘힘’이 되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정당한 절차를 거쳐 그에 따라 정해진 룰에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힘’을 빌어 적당히 덮고 넘어가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런 시절의 끝자락이었을 무렵 교통 경찰에게 잡혀서 과태료는 낼 테니 뭘 잘못했는지 알려달라는 20대의 나는 정말 철없는 햇병아리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경찰은 ‘인정’이라는 융통성을 발휘해 주었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해맑게 웃고 사라진 나 역시 부조리의 수혜자였다.


이제는 그런 일들이 없다. 운전 면허증 밑에 만원짜리를 깔아서 건네다가는 뇌물공여로 가중처벌을 받을 것이고, 과태료 대상자를 그냥 봐주는 것은 융통성 있는 인정이 아니라 직무유기다. 이장님은 뭘 어찌할 힘이 없으며, '내가 느그 시장하고!'를 목 놓아 외치다가는 시장 모가지까지 위태로울 수 있다.


그러나 진실로 없어진 일일까? 옛 시절에 보편적이었던 일이 장벽을 드높여 ‘알만한’ 이들끼리의 견고한 세계가 되어 더 큰 특혜와 더 큰 부조리를 알음알음 덮고 가는 세상이다. 동네 이장집 문턱은 뽀얀 먼지만 날리겠지만, 국회의원 아들이 운영하는 건설 회사는 독점계약을 따내고 억대 수임료를 받은 전관 변호사는 후배 판사과 검사에게 그냥 '무게감 있는 안부전화'를 걸지 않겠는가.


앞서 ‘중앙지검 수사관 김영식씨’의 전화를 받은 나는 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냐 생각 하면서 그와 같이 좀 놀아주다 전화를 끊었다. 에이, 연기력이 좀 딸리네. 하면서.

그런데 '서울 중앙지검입니다. '로 시작하는 전화를 받은 어떤 이는 한껏 긴장되고 위축되어 불러주는 대로 사이트에 접속해 차곡차곡 자신의 재산을 넘겨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잘못한 게 없는데 뭘 겁내서 하란다고 다 하나?일단 바쁘면 전화를 끊고 나중에 다시 하라고 해도 되고, 다시 전화를 걸어서 뭐가 문제인지, 왜 내가 그래야 하는지 물어보면 되는건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벌벌 떨면서 '그자리에서' 시키는 대로 하다니! 어우~ 답답하다!


그런데 검찰 아닌가. 그것도 중앙지검이라지 않나. 뭔가 있겠지. 물어보면 괜히 더 골치아파 지는 거 아니니야? 지금 당장 하라는 데 안하면 나중에 불이익 생기는 거 아니야? 내가 바쁘다고 끊어도 되는거야? 검찰인데?....... 까라면 까던 시대, 뭘 잘못했냐고 감히 묻지 못했던 시대를 너무 오래 살았던 기억이 넙죽 나의 계좌를 까게 만든 것은 아닌가. 우리에게 공권력은 그런 것이었다. 마주하면 '특별히 무서운' 무엇이었다.




서울 중앙지검 수사관 김영식씨는 며칠 후에 또 전화를 했다. 이번에도 42세 남성, 백동주씨를 아냐고 물었다. 나는 ‘그 사람 아직 못 잡았냐’고 물었다. 잠시 당황해서 버벅거리는 상대에게 며칠 전에도 나한테 전화 걸었었는데, 번호 봐가면서 전화하는 성의는 좀 갖추라고 했다. 전화가 툭 끊어졌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들에게 넘겨줄 게 없다. 도둑이 물건을 훔치러 왔다가 찢어지게 가난한 처지에 마음이 아파 쌀독에 쌀을 채워주고 갔다는 전래동화처럼, 온갖 곳에서 ‘퍼가요~ ’만 이어지는 계좌 내역이 딱해서 마음 약한 피싱범이 내 계좌에 돈을 채워줄지도 모를 일이다.


공권력은 국민의 안전, 국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왜? 하고 물을 때 비뚤어진 권위로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가도록 설명하고, 누구도 예외없이 모두에게 똑같은 절차와 방법으로 공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당연해진다면, 소환조사가 원칙이지만 '특별히' 온라인으로 할 수 있게 한다는 수사관의 재량은 모두가 아는 비상식이 될것이다. 따라서 공권력이라는 것은 공식적인 방법이 아닌 것으로는 국민의 삶에 어떠한 영향력도 끼칠 수 없다는 것이 보편의 상식이 될 때, 난데없이 전화해서 42세 남성 백동주를 애타게 찾는 김영식씨는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에 앞서 이미 사라진 관행이 여전히 통용되는 '특별한' 이들과, 그들이 되기위한 몸부림, 특별하지 못한 이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먼저 소멸해야 할 것이다. 공권력은 그 누구에게도 특별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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