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문제가 화두이다. 특히 수도권, 그 중 서울의 집값은 무서울 지경인 것 같다. 이런저런 대책과 그 실효성, 부작용 등에 대해 설왕설래가 많은 모양이지만 나의 얕은 경험과 지식으로 끼어들 주제는 아닌 듯 하다. 그저 많은 사람들이 갖고 싶어하는 집은 많이 비싸구나. 생각할 뿐이다. 부동산이 또 다른 계급 사회의 척도가 된 것은 오래된 일이니 그에 따르는 인간의 상승 욕구를 과연 막을 수 있을까? 그저 막연히 짐작할 뿐이다.
모 인터넷 커뮤니티에 글이 하나 올라왔다.
글쓴이는 아파트에 살다가 형편에 맞춰 비슷한 가격으로 조금 넓은 평수의 오래된 빌라로 이사를 갔는데 전에 살던 아파트에 비해 환경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하다는 것이다. 방음, 보안, 교통, 이웃 등등 모든 것들이 아파트에 못 미친다는 요지였다. 지저분한 환경, 얇은 벽체로 인해 시끄러운 층간 소음, 관리주체의 부재로 공동 시설의 관리가 안되는 상황, 외부인의 출입을 막을 수 없는 구조, 끔찍한 주차난 등등 이런 환경에서 아이를 키워야 하는 것이 불편하고 배우자와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글이었다. 생각의 편차가 있을 수 있는 부분이지만 당사자의 입장을 고려해 보면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못내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우선 아이 또래의 주변 아이들의 ‘태’가 다르단다. 옷을 입은 입성이나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아이는 차를 타고 가야 하는 아파트 단지 인근의 어린이집으로 옮겼는데 그 아이들과 비교해보니 확연히 ‘태’가 다르다고 한다.
그리고 주변에 특수학교가 있어서 ‘정신지체’장애인들이 많이 사는데 '아이키우는' 입장에서 불안하다고 했다. 몇 해 전 ‘정신지체’장애인이 두 살배기 아이를 집어던진 일이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이 많이 보여서 '아이키우기'가 불안하다는 것이다.
혹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 표현을 바로잡고 싶은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글을 쓴 글쓴이의 표현을 그대로 옮긴 것은 일반에게 널리 쓰이는 표현, 대중의 인식을 담고 있는 부분이라 생각해서 바로잡지 않고 그대로 옮겼다.
이럴 때 참 막막해진다. 비슷한 일에 대해 늘 같은 말을 하게 되는데, 장애인이나 소위 사회적 약자가 절대 선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각기 다른 개인이 모여 공통의 특성을 가진 집단으로 지칭되는 것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비장애인이나 우리가 쉽게 '보통'의 사람들로 표현하는 다수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집단도 절대 선이 아니듯, 범죄를 저지른 것은 특정한 개인이지 어떤 특성을 공유하는 집단이 아니다. 만약 살인을 저지른 이가 남성이면 남성을, 여성이면 여성을, 노년기의 사람이면 노인을 잠재적 살인자, 범죄집단으로 보고 모두를 경계해야 하는가?
지금 내가 사는 곳이 오래된 빌라이다. 지방 소도시이다 보니 수도권의 상황과 직접 견주기는 어렵겠지만 대충 요즘 사회의 주거지 계급에 따르자면 <가난한 빌라 동네>라고 봐야 할 것이다. 노인회장 자리를 두고 노인들 끼리 패가 나뉘고, 통장 아주머니가 수시로 ‘주민 여러분,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류의 문자를 보내고, 서로 알음알음 사정을 훤히 꿰고 있는, 좋게 말하면 옛 정경이 남은 소박한 마을이고, 때때로 열두폭 오지랖이 펄럭이는 피곤한 동네이기도 하다.
몇 해 전이었다. 늦은 저녁 초인종이 울려 나가보니 앞 동의 아주머니 두 분이 서명지를 들고 다니며 서명을 받고 있었다. 엄마와도 약간의 친분이 있는 분이신 듯 했다. 우리 집의 암묵적인 룰- 필기구로 써야 하는 일련의 행위를 담당하는 자는 큰 딸년이다.-에 따라 내가 서명지를 읽었다. 천천히 읽고 있는데, 아주머니들은 그냥 서명하기만 하면 된다고 성화다. 엄마는 그저 ‘뭔데? 얼른 해줘.’ 라며 대수롭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런데 나는 안되겠다고 볼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지금 이거, 말도 안되는 월권인건 알고 다니시는 거냐, 친한 분들끼리 똘똘 뭉쳐서 다른 주민을 쫒아내겠다는 거에 동의하라고 서명을 받으시는 거냐고 되물었더니 아주머니 중 한 분이 ‘싫음 말아요.’ 하고 휑 돌아서서 가버렸다.
서명지의 요지는 이러했다.
<*동 ***호 에 거주하는 ‘정신지체’가 있는 아들이 수시로 소리를 지르고 발길질을 하는 등, 위험 행동을 하고 있어 아래층 주민이 고통을 호소하므로 서명을 받아 '정신지체'인과 주민 들 모두가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그에게 맞는 다른 곳으로 이사할 것을 요청하려고 한다.>
소리를 지른다는 주민에게 장애가 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었다.
서명을 받으러 다니는 아주머니 중 한 분이 당사자인 아래층 주민이고, 같이 다니는 아주머니는 그분의 절친인 모양이며 당사자만큼이나 열심히 서명운동에 앞장선 이는 아래층 주민의 앞집에 거주하는 분이었는데 그분의 막내딸이야말로 ‘정신지체’ 라 불리는 지적장애인이었다. 그들이 서명을 받으러 초인종을 누른 우리집에도 그들의 표현대로 ‘정신지체’ 장애인, 심한 지적장애를 갖고 있는 내 동생이 살고 있었다.
그야말로 웃픈장면 아닌가. 장애인이 살고 있는 집에 찾아와 장애인을 내쫒자고 한다. 물론, 내 동생은 소리도 지르지 않으며 거동이 불편해 발길질은 커녕, 하루의 대부분을 누워서 지내니 시끄럽다고 쫒겨날 일은 없다. 그럼에도 그 단어선택은 명백한 폭력이다.
피해를 주는 행위를 옹호할 생각은 없다. 아래층 주민의 고충도 이해한다. 그러나 내가 소름 끼쳤던 것은 남들과 다른 어떤 특성을 ‘나쁜 것’ 으로 싸잡아 묶어두고 그 특성을 가진 이들을 내쫓아도 될 ‘죄질’에 포함시키는 무신경한 행위였다. 그런 행동을 하는 행위 자체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지체'에 방점을 두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것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와중에 자신의 딸 역시 그 범주안에 포함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는 이들과 친하니까 괜찮겠지 라는 생각으로 앞장선 아주머니가 특히 딱하기 그지 없었다.
말은 생각을 부르고, 그러한 생각들이 모이면 어느새 단단하게 규정되는 것이기에 말 한마디, 단어 선택 하나에도 신중해야 한다. 그런 이유로 그것이 누구든 어떤 집단을 함부로 싸잡아 불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어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마음이 아렸던 것은 듣자니 어머니와 나이든 아들이 단 둘이 살았다고 하는데, 자신의 코앞에서 내 자식을 쫒아 내라며 서명지를 받고 다니는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했을 그 어머니의 심정을 외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진심으로 이 ‘코딱지만한 집구석’을 꿰차고 않아 친목질 하며, 속칭 ‘을’들끼리 ‘갑질’하는 꼬라지가 우스울 따름이었다. 아, 여담으로 내게 서명지의 실체를 전해 들은 내 엄마는 당장에 그들을 쫒아가 한바탕 푸닥거리를 하고 돌아오셨다. 아무래도 내 기질은 모계유전인 듯 싶다.
이런 황당하고 당당한 혐오들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자신의 재산권, 자신의 환경을 지키고 싶다고 해서 타인의 인권은 ‘환경미화’의 차원으로 취급해도 되는 일인지, 몇 번을 생각해 봐도 내 기준에서는 이해범주가 아니었다. 어떤 특성을 가진 이들을 거주지를 열악하게 만드는 ‘것’에 포함시키는 예의없는 생각이 씁쓸할 따름이다. 아마도 비싼 아파트에는 ‘나를 불편하게 하는’ 어떤 이들이 살 확률이 적다는 생각에서 나온 결론일 것이다. 부를 추구하다 못해 가난이 혐오의 대상이 되고, 그곳에서 마주친 일부의 특성은 일반화 되어 그 집단 전체가 가난을 구성하는 '합리적인'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만약 서두에 언급했던 글쓴이가 내가 사는 동네로 이사왔다면 내 동생과 몇몇의 장애인은 거주 환경을 해치는 불안요소가 될 것이다. 가족들을 '이런' 곳에서 살게한 미안함과 서러움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집이 단순 거주의 공간을 넘어선 지는 오래되었다. 가장 눈에 띄는 부의 척도이자 삶의 질을 가르는 요소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또한 집 자체의 안락함과 별개로 그에 따라오는 주변 환경의 인프라 역시 무시할 수는 없는 지점이다. 그러니까 많은 이들이 강남 아파트를 소망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현실에서 소박한 삶에 무조건 만족하라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 백인백색, 누군가는 물질에서 기쁨을 찾는 이들도 있으며, 내 통장의 숫자가 행복의 척도인 사람도 있다. 범죄행위가 아닌 이상 개인의 성향과 자유를 타인이 재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 이익이 달린 문제에 예민해지는 일, 또한 아무리 일해도 번듯한 집 한 채 갖기 어려운 현실, 박탈감, 그 모든 것들을 모조리 이해할 수 있다. 나 역시 집도 절도 없는 처지이자 앞으로도 내집 마련은 요원한 일일 것이라 생각하면 문득 서글프기도 하다. 따라서 기왕이면 쾌적한 환경에서 살고 싶은 욕구를 손가락질 할 수는 없다. 능력만 된다면 모든 편의시설이 갖춰진 곳에서 그만한 비용을 지불하며 살고 싶은 것은 일견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사람은 사람이다. 당신의 쾌적함을 방해하는 당신의 이웃이 불편할 수는 있다. ‘시불시불’ 이웃복도 없다면서 욕할 수도 있다.그러나 그는 사람이다. 내 주거환경을 망치는 ‘것’들의 범주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더구나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음에도 비슷한 특성을 공유한다는 이유만으로 싸잡혀 위험한 ‘것’ 으로 치부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자 끔찍한 무례이다.
그 입장이 되어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타인의 인격을 무시할 만큼 절대우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사람같지않은 몇몇을 제외하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