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라는 단어를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자주, 흔히 쓰이는 단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근래 들어 접미사처럼 딱 달라붙은 ‘혐오’를 마주하게 되었다.
‘여혐’ ‘남혐’을 필두로 ‘노인혐오’ ‘동성애혐오’ ‘장애인혐오’ 심지어 ‘비만인혐오’ 까지.
혐오[嫌惡]- 싫어하고 미워함
혐오의 사전적 정의이다.
여자를 싫어하고, 남자를 미워하고, 노인을 싫어하고, 장애인을 미워하고, 비만을 싫어하고 미워한다. 담백하게 말하자면 어떤 대상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혐오의 대상에 대한 공격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은근한 눈빛이든, 말이든, 글이든 심지어 물리적 폭력까지 뒤따르는 것이다. 인터넷 사회가 되면서 우리가 각자의 생각을 드러낼 창구가 많아졌다. 개인 블로그와 인스타, 페이스북, 트위터를 비롯해 다양한 인터넷 커뮤니티의 게시판에 자신의 생각을 글로 올린다. 그러면서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그 안에서 생각을 공고히 한다. 그것이 긍정적인 울림으로 자리 잡을 때도 많다. 그러나 자정작용 없이 나와 다른 대상에 대한 혐오를 토해내는 것에 방패막이될 때도 있다. 주변은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특정 성별이나 어떤 대상에 대한 혐오는 그 대상이 명확한 만큼 비판이 뒤따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가난’은 그렇지 않다. 모두가 가난을 혐오해도 딱히 반론할 거리가 없다. 경제성장기를 거쳐 선진국의 문턱에 오르기까지 우리는 ‘잘 살아보세.’의 깃발 아래 모이지 않았던가? 자기 계발서 1위는 돈 이야기이고, 모든 영역에서 돈이 관계되지 않는 경우는 없다. 의식주는 돈이다. 그러니 가난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국민의 힘에서 정권을 가져갔다.
나는 국민의 힘을 지지하지 않았기에 상실감이 있다. 국민의 힘을 지지한 누군가가 승리감을 맛보았다면 그것을 존중하듯, 나의 상실감 역시 존중받을 수 있는 영역이다. 브런치에 정치적 색채를 띠는 이야기는 잘 쓰지 않는데, 정치 역시 삶의 이야기이고 내가 딸기를 좋아하느냐 수박을 좋아하느냐의 기호만큼이나 단호한 것이 이 영역이니 굳이 감출 이유도 없다.
나는 1997년에 첫 번째 대통령 선거를 했다. 당시 이인제 후보를 뽑았다. 왜? 젊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반공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이며 주변 어른들에게 ‘김대중’ 이 대통령이 되면 ‘이북’에 나라를 갖다 바치고 나라가 망한다는 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당시의 나는 1980년 광주 민주화 항쟁도, 1987년 민주화 운동도 모르는 시골 아이였다. 다만 왕정국가처럼 한 세력이 계속해서 지배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막연한 생각과 김대중은 빨갱이라는 ‘동네 어른들 피셜’ 정보가 맞물린 결과가 당시 젊은 후보였던 이인제에게 투표를 한 것이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후에 알았으니 김대중의 당선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이인제의 갈라치기에 나 역시 얼떨결에 한몫한 셈이다.,
이후 노무현을 뽑았고, 내가 뽑아놓고 그를 마음껏 욕했다.
정동영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투표를 포기했고, 이명박 대통령을 맞이했다.
문재인에게 투표했지만,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다.
박근혜의 탄핵으로 5월에 열린 대선에서 문재인에게 투표했다.
그리고 2022년 3월 9일 내가 뽑은 이재명 후보는 낙선했다.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투표를 한다. 그리고 어느 선거나 그러하듯 대부분의 보통의 사람들은 ‘나의 이익’에 투표한다. 그러나 그것이 곧 자본이나 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가 하는 일에 큰 위기가 되지 않는 한,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면, 그래서 일상의 평화가 담보된다면 나의 금전적 이익을 조금 양보하는 경우도 있다. ‘여성가족부’를 해체한다는 당에 투표를 하기도 하고, 여성정책을 강화하는 쪽에 투표를 하기도 한다. 전 국민 1억 원을 지급한다는 후보에게 투표자의 0.8프로가 투표를 했다. 이것을 어느 것이 옳다 할 수 있을까.
세상에는 다양한 갈등이 존재하고 그것은 투표로 표출된다. 국민이 ‘갑질’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기가 선거철 아닌가. 투표로 우리의 힘을 보여주자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정치인들이 리드하는 시대가 아니다. 이제 정치인들은 시류를 읽고,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것이 선거전략이다. 내 편만 잘 챙기면 되는 것이다. 어느 쪽이 더 많이 반응하는지가 선거의 승패를 가른다.
이번에는 국민의 힘이 이겼다.
적극적으로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겠다고 했고, 부동산 시장에서 가진 자들의 권리를 보장해 주겠다고 했고, 젊은 남성층의 반감에 반응해 여성가족부를 해체한다고 했다. 복지예산은 줄일 것이며, 노동조합을 비토 했고, 중대재해처벌법과 최저임금을 손보겠다고 했다.
사람들은 그쪽에 투표했다. 자신들의 이익과 욕망에 따른 선택이다.
개표 결과를 놓고 보면 강남 3구의 몰표가 눈에 띈다. 비밀 투표이기에 연령이나 성별은 정확한 데이터를 찾을 수 없다. 유일하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지역별 득표율인데 대한민국에서 소위 ‘잘 산다는’ 동네와 ‘잘 살았던’ 동네의 득표율이 말하는 것이 무엇일까?
현재의 부동산 가격에 따른 수도권 지역의 명확한 지지성향의 바탕이 자본이듯 영. 호남으로 대표되는 지역감정의 바탕 또한 당시 영남지역에 몰빵 했던 경제정책과 부의 창출이 한 몫했다고 생각한다. 산업화 시절,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상대적으로 영남 사람들은 잘 살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가장 빛나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영남 노년층의 지지 정서는 그 마음에 기반한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한다. 가장 풍요롭고 젊은 시절의 정치적 리더를 여전히 그리워하는 것이다.
윤석열 후보가 당선이 되자마자 최저임금제와 주 52시간 노동제를 손본다는 기사가 제일 먼저 쏟아져 나왔다. 그는 후보 시절에 월급 150만 원에도 일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다고 했고, 없는 사람들은 먹고 죽지 않는다면 불량식품이라도, 그보다 낮은 것이라도 먹게 해 줘야 한다고 공공연히 밝혔다. 그것이 그의 가치관이다. 가난한 이들도 구성원 안에서 조금 더 나은 삶을 누릴 방향을 제시하는 대신 이미 삶은 결정되었으니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이 맞다는 계급논리이다. 부모의 재력이 자식의 재력이 되고, 부의 세습이 또다른 계급사회가 된 세상에서 '낮은' 계급의 이들에게 시혜를 베풀듯 내뱉은 언어들이다.
당장 최저임금이 부담스러운 자영업자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의 보호장치가 없다면, 충분한 여력이 있는 자본가들 역시 최저임금 수준에서 직원들의 급여를 책정할 것이고 상대적으로 형편이 어려운 최저임금 노동자들의 삶은 점점 더 팍팍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한 달에 한 번 먹던 치킨이나 취미생활도 머뭇거리게 할 것이며, 그들이 소비자인 소규모 자영업자의 삶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끼칠 것이다.
지역별 차등화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지방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유일한 여유가 집값이 싸다는 것이다. 다른 물가는 동일하며 오히려 비싸고 반대로 여러 가지 인프라는 형편없이 부족하다. 프랜차이즈 커피나 치킨이 지역별로 가격이 다르지 않고, 일반 식당이나 카페, 공산품 역시 상향평준화되었다. 그런데 최저임금을 지역별 차등을 주겠다는 이야기는 집값이 싼 동네에서 사는 당신들은 더 적은 월급을 받아도 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부동산 가격에 따른 계급사회인가? 그리고 최저임금 받는 노동자는 지방에서도 좋은 집에 사는 경우가 드물다. 결국 지방에서조차 좋은 집, 비싼 집에 사는 이들의 이익만 보장해 주는 꼴이 되고 만다. 그러면 누가 지방에 남을까? 지방 소멸이 문제라면서도 그들을 몰아내겠다는 뜻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럴수록 수도권의 과밀화는 심화될 것이고, 비싼 월세와 치솟는 집값으로 많은 사람들은 사람답게 살 한 평짜리 집마저 사치가 될지도 모른다. 이미 가진자들의 부의 독점은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또한 복지는 빨갱이가 아니다. 임대주택은 특정지역의 할렘화를 막는 장치이며, 노인 연금은 자식 세대의 부담을 줄이는 것이다. 장애인이나 치매 노인에 대한 지원은 그들 가족의 해체를 막는다. 가족 부양에 대한 부담을 줄인 건강한 구성원이 사회에서 일하고 살 수 있게 한다. 또한 그들로 인해 파생된 산업과 그를 기반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생계 또한 달려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귀한 세금’을 아무것도 못 하는 ‘쓸데없는’ 사람들에게 쏟아붓는 것이 아니다.
아주 일부의 정말 부자가 아니라면 우리는 모두 서로의 어깨에 조금씩 손을 얹고 사는 것이다. 그런데 다들 가난을 혐오하고 미워하며, 가진 것이 없는 이들에 대한 멸시를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아직 부자가 아니지만 장래에 부자가 될 것이기에 나의 이익을 나누는 것을 비난하고 경멸한다.
상실감이 들었다. 모든 것의 기준점이 ‘부’가 된 세상에서 나이 마흔을 넘겼지만, 집도 없고, 가난한 나의 목소리는 ‘가진 것 없는 이들의 열등감’으로 비칠 것 같았다. 그래서 자신이 없다. 이만큼 살았는데 아무것도 없는 너는 더 이상 애쓰지 말고 그냥 받아들여라. 세상은 너 같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러니 괜히 목소리 내지 마라. 지질한 너의 목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니 밥 먹을 걱정이나 해라. 혐오스러운 가난뱅이야.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막 고3이 된 자녀를 둔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같은 반 친구들 중에 생일이 빠른 친구들은 이번에 투표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윤석열 후보를 뽑은 친구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유를 물어보니, ‘서울대잖아.’ ‘검찰총장도 했고 돈 많다며.’라고 했다고 한다.
젊은 친구들이 되고 싶은 대상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그들 앞에서 ‘라테’ 타령하면서 꾸짖고 야단치는 멍청한 어른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의 세상은 이미 그렇게 되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들의 부모가 보여준 모습으로, 우리가 부르짖는 목표를 통해 그들의 가치관이 형성된 것이다.
이재명 후보가 선거운동을 하면서 ‘자신의 가난하던 시절’을 이야기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좋지 않았다.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고, 우리의 리더로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투표했고 가장 근소한 차이로 진 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민주당이나 이재명 후보에 대한 지지보다는 반대세력에 대한 반감이 더 컸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한 마음에 기대 선거운동을 했던 민주당이 과연 자성을 할까 모르겠다. 사실 그들 개인 개인을 놓고 보면 야당이 된들, 본인들의 삶에 무슨 영향이 있겠는가.
이번 선거에서 국민의 힘 윤석열 후보에게 투표한 이들 중 어떤 이들은 집권세력인 '민주당’에게 무언가를 보여주겠다면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그들의 삶에 직격으로 영향을 줄 노동정책이나 의료민영화 등이 언론에 오르내리니 민주당이 다수당이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반문하고 싶다. 민주당이 굳이 나서서 그들의 이익을 대변해줄 이유가 있을까?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는 후보처럼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며 반대 진영에 투표해 놓고, 자신의 이익은 투표하지 않은 쪽에서 지켜주기를 바라는 것은 몰염치이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고 아쉽게도 그 책임은 공동체의 모두가 함께 질 수밖에 없다. 완벽하게 내 뜻에 맞는 정치는 완벽한 이상형을 만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에 가깝다.
나는 국민의 힘 윤석열 후보가 구둣발로 열차 좌석에 발을 올리고, 선거운동을 함께하는 당 관계자에게 삿대질을 하는 그 사소한 행동, 그리고 절대 사과하지 않는 태도가 절대로 그를 뽑을 수 없는 이유였지만, 누군가에게는 당당하고 멋진 리더의 모습이라고 하니 생각의 다름을 인정해야겠다.
앞으로도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과 욕망에 투표할 것이다. 나의 이익이 조금 줄어든다고 해도 지지해야 할 만큼의 공동체적 가치는 과연 어디까지일 것인지. 가난한 나는 목소리를 줄이고 그냥 지켜볼 참이다. 어차피 나에게 기회는 많지 않을 세상이니.
오래전에 일로 알게 된 어떤 이가 말했다.
“전두환 욕하지 말아요. 우리 동네 깡촌까지 넓은 길 닦아준 건 다 전두환 때문이라고요. 우리는 얼마나 좋았는데.”
그는 나보다 두 살이 어렸고, 합천이 고향이었다.
너무나 투명한 선거 결과에 내적 상처를 받았다.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어서 내 일에 집중할 생각이다. 혹시 잘 되어 내가 기득권이 된다면 그래도 ‘공동체적 가치’를 위해 나의 이익을 양보할 수 있는지, 그 입장이 되어 다시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현재는 노령연금 수령하는 엄마와 장애인 연금을 수령하는 동생과 함께 사는 가난한 무명작가일 뿐이라 지금 내가 사회적 목소리를 내어봤자 사람들이 혐오하는 ‘가난뱅이’의 이야기일 뿐이니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그것이 현실이다.
불필요한 사족이지만, 정치 이야기에 즉각 반응하는 공격성을 미리 막고자 분명히 밝힌다.
나는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고, 이재명 개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국민의 힘의 정책방향과 정체성을 거부하며 그 반대세력에 힘을 주고 싶은 한 톨의 시민이다.
실질적 양당체제인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투명하게 기득권을 대변하는 정당을 지지할 수는 없으니 썩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반대쪽에 힘을 싣는 것이다.
서울대 출신이라고, 좋은 집에 산다고, 부자라고 그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런다고 내가 서울대 출신이 되는 것도 아니고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은연중에 드러나는 사람에 대한 태도와 덜 가진 이들에 대한 감정적 이해가 없는 지도자의 좁은 품이 걱정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