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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Oct 24. 2020

나비 허리, 새파란 초생달.


바다와 나비 /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지금도 교과과정 안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전에 학원에서 국어 강사로 일했을 때 지겹도록 많이 읽었던 시다. 해맑고 발랄한 중학생들을 앞에 앉혀두고 이 시의 주제는 무엇이며, 나비가 상징하는 의미는 무엇이고, 시각적 심상이 어떻고, 촉각적 심상이 어떻고, 대비는 어떻고 뭐 그런 것들을 늘어놓았었다.     

칠판에 시를 써놓고 알록달록 분필로 동그라미를 치면서 별도 몇 개 그려 넣었겠지.

시험에 자주 나오는 부분이라며 분필이 부러지도록 몇 겹의 동그라미를 그리고 목소리를 높였었다.     

그런데 정작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울컥, 감정을 삼켜야했다.

너는 바다가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팔랑팔랑 내려앉았다가 흠뻑 젖어서 돌아가는구나.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시인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그 부분의 상징이 무엇이었든, 무엇을 표현하려 하는 것이었든..

나는 그 구절을 읽을 때마다 마치 내 몸통을 잘라놓은 듯 시리고 시렸다. 너무 차가운 것이 베고 지나간 자리가 아주 잠시 뜨거운 것처럼, 마음 안에서 감당하지 못할 불길이 올랐다가 이내 손발이 곱도록 차가워졌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문득 그 구절이 생각날 때가 있다.

가을, 늦은 시간 학원 수업을 마치고 키 작아 보일까봐 두려워서 벗지 못했던 높은 하이힐을 신고 은행잎이 뒤덮인 길을 또각또각 절뚝절뚝 걸어왔었다. 밤바람은 차가웠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검은빛 뒤에 숨은 푸른 빛이 야물었다. 단단하고 차가운 밤하늘은 어느 한구석 빈틈없이 내 머리 위를 덮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때처럼 하늘이 야물고, 코끝을 지나는 바람 냄새가 차가운 날이다. 

바다를 알지도 못했던 나비처럼 나도 지쳤다. 

각자의 슬픔과 각자의 삶의 무게는 제각각이라 그것을 저울에 올려놓고 무게를 달 까닭은 없다.     

삶은 그것이 무엇이든 놓을 때가 되면 내가 어쩌지 않아도 놓아지는 것으므로 내가 앞질러서 '놓겠다', '멈추겠다' 하지는 않겠다.          


다만, 나의 가을의 한 도막이 섧도록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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