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oijak Oct 19. 2020

모두가 천재일 필요는 없습니다.

잘 만든 영화를 볼 때, 우연히 첫 회를 보고 홀린 듯이 며칠 밤을 새서 정주행하는 드라마를 만났을 때, 문장 한줄 한줄이 가슴에 박히는 책을 읽을 때,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으면서 울끈 피가 끓습니다. 솔직히 욕이 나오죠.      


"이것들은 천재인가? 재수없어."        


솔직히 저도 한 때 나의 천재성을 믿은 적이 있습니다. 한 두 번 쯤, 그리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았어도 어떤 성과를 손에 넣었던 적이 있거든요. 

가만히 돌이켜 보면, 운이 좋았거나 내가 천재였다기보다는 그동안 꾸역꾸역 쌓아둔 밑천을 박박 긁어서 그때 꺼내먹은 것입니다. 결국, 오래 곰삭은 시간이 반짝 선물을 건네준 겁니다. 겨우 그정도 선물만 준 게 얄미워서 그냥 천재성으로 믿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영화에서, 소설에서 내가 생각했던 에피소드가 그대로 등장하는 적이 있습니다. 솔직히 뱃속이 뒤틀리고, 괜히 약이 오르지요. 그럴 때 냉정해져야 합니다. 그들이 저것을 만들어 내는 동안, 나는 무엇을 했던가? 저 장면 하나 말고 나머지의 개연성과 스토리텔링은 제자리에 있던가? 다행히, 질투에 사로잡혀 눈이 멀진 않았어요. 스스로에게도 비교적 냉철한 편이라서요. 정신이 돌아오고, 그들에게 창백한 질투를 담아 찬사를 보냅니다. 그래, 멋지다.          


요 며칠 잘 만든 드라마를 정주행 했습니다. 또 찰지게 욕을 했습니다. “씨바, 저것은 천재인가? 재수없어.” 눈물이 쏟아질 듯 울컥하다가 비시시 웃음이 납니다. 잘 만든 이야기, 매력적인 스토리텔링. 와, 진짜 나도 하고 싶다. 부럽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없습니다. 

나이며, 경제적 현실이며 온갖 이유를 끄집어 내보니 한도 끝도 없군요. 왜 진즉 독하게 매달리지 못했을까, 내가 10년 전에 왜 그렇게 놓아버렸을까. 그땐 내가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데 무려 지금보다 10살이나 어렸잖아요. 허리도 안 아팠고, 팔도 안 아팠습니다.           




오래전에 강릉으로 여행을 갔었습니다. 마당에 큰 감나무가 있는 민박집에서 묵었는데요. 민박집 아주머니가 감자부치기 꾸줄까? 하시기에 냉큼 감사하다고 했죠. 아주머니는 마당 평상에 앉아 강판에 감자를 가셨습니다. 옆에 앉아서 이얘기 저얘기 나누고 있는데, 아주머니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런두런 들려주십니다. 큰 아들은 서울에서 뭘 하고, 딸은 시집가서 애기가 몇 살이고, 그냥 평범한 사는 이야기 말입니다. 자제분은 아드님하고 따님하고 둘이에요? 하고 물어봤더니 셋. 이라고 하시더라구요. 막둥이가 아들이여. 아, 막내 아드님은 여기 안 살아요? 다른 데 사시나봐요? 했죠. 응. 하늘로 갔어. 지 엄마 싫다고 먼저 가버렸어. 하더니 피식, 바람 빠지듯 웃으시더니 하늘을 한번 보시고 후우~한숨을 깊이 쉬셨어요. 그리고는 박박박 갈던 감자를 마저 갑니다. 그리고는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시더라구요.      


"여서 기다려. 금방 꾸다 주께. 평상에 앉어 바람 쐬면서 먹으면 맛나다이."     


아주머니의 이야기에는 기교가 없습니다. 이쯤에서 인물을 소개하고, 이쯤에서 감동을 터트려야 한다는 계산도 없습니다. 뒤통수 후려치는 반전도 없구요. 그런데 제가 들은 어떤 이야기보다 마음에 깊이 남아서 아직도 그 장면이 생각나요. 아주머니는 무심히 감자를 가셨고,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서 주방으로 가셨어요. 먼저 떠난 자식 또래의 젊은 손님들에게 감자전을 한 접시 내어주고, 편히 놀라고 하시면서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냥 그게 다였어요. 우리 곁에 앉아서 이야기를 이어가지도, 눈물 바람을 하지도, 그려먼서 추억을 되새기지도 않으셨습니다. 담담하게 가슴에 남은 이야기를 무심히 흘리듯 한 말씀 툭 던져 놓은게 전부였지만 얼치기 작가 지망생이던 저는 그때도 지금도 그보다 뭉근하게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자신은 없습니다.     



     

저는 요즘 생각이 복잡합니다. 훌쩍 흘러버린 시간, 말을 안 듣는 몸뚱이, 자꾸만 외면하고 회피하고 싶은 현실.그리고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하고 보내는 시간이 길어요. 책 한줄 안 읽고, 글 한줄을 안 쓰고 그냥 가만히 앉아있어요. 운동은 커녕 하루에 채 백걸음도 안 걸을지도 모릅니다. 그냥 멍하니 앉아 있다가 화장실 가려고 일어나면 무릎이 팍 꺾입니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던 10년 전의 온갖 핑계들을 지금 다시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좀 더 업그레이드 된 핑계라고 보는게 맞겠습니다. 게다가 나는 결코 천재가 될 수 없다는 열등감도 한 몫 하고 있겠지요. 당연히 나는 천재가 아닙니다. 세상을 놀라게 할 반전이나, 보는 이의 심장을 쥐어뜯을 감탄을 부르는 이야기를 만들 자신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만날 때마다 질투가 나서 욕이 튀어나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모두가 천재일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들은 다 제몫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한 둘의 천재는 있습니다.그러나 모두가 천재일 수도, 그럴 이유도 없죠. 세상의 스토리텔링은 색색이고, 우리의 이야기도 알록달록하니까요.


저도 그냥 쓰려고 합니다. 제게 주어진 시간동안, 그게 알록달록이든 얼룩덜룩이든.



이제, 가을이 짙어집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별일 없는 날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