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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Oct 15. 2020

별일 없는 날들

감기 기운이 살짝 돌았다. 굴러다니는 감기약을 집어 먹었다. 원칙은 진료 후에 내게 맞는 처방을 받아왔어야 했겠지만 그냥 모친이 동네 의원에서 지어다 놓은 상비용 감기약을 집어 먹었다. 알약만 약 9개에 달하는 감기약은 '뭐라도 좋으니 하나만 얻어걸려라' 수준으로 온갖 증상에 효과가 있는 약이 다 들어 있는 것 같다. 콧물도 잠재우고, 기침도 삭이고, 두통도 개선해 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쪼개질 듯 머리가 아팠고, 잠을 못 자니 미칠 것 같았다. 그래서 저 독한 감기약을 먹으면 최소한 잠은 잘 오겠거니 하는 기대로 꼴깍 알약을 삼켰다.

     

기대대로 스믈스물 잠이 왔다. 그런데 까무룩 잠이 들 찰라에 갑자기 호흡이 훅 딸리며 목이 콱 조이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눈을 떠서 잠을 깼는데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다시 훅! 숨이 트였고 손 끝에 닿는 생수병의 미지근한 물을 삼켰다. 몇 번 숨을 몰아쉬고 나니 저승길 문턱에서 이승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감기약 때문인가? 모를 일이다. 그 병원의 감기약을 처음 먹은 것도 아니었고, 그 때문에 사람이 큰일이 날 조합이라면 벌써 사달이 나도 났을 일이니 애먼 감기약 탓을 하며 일반화 시킬 수는 없다. 그저 그 순간 내 몸이 이상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자고 싶었는데 잠을 못 잤으니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졌고, 그럴수록 잠은 더 안 왔다. 근래들어 계속 이 상태였다. 계속되는 불면과 꼬여버린 신체리듬에 괜히 울화가 치미는 와중에 배까지 고팠다. 온갖 인간의 본능이 제멋대로 신호를 내는 중이었다. 냉장고를 열어봐도 딱히 먹을 것이 없었고, 저녁을 먹고 말끔하게 설거지를 해 놓고 단잠에 빠진 모친이 미워졌다. 염치도 없이. 


편의점을 가자니 이미 새벽 3시를 넘겼고 그 시간에 나가서 편의점까지 걸어갈 생각을 하니 영 귀찮고 번잡스러웠다. 요 며칠 유튭으로 온갖 범죄 이야기 시리즈를 보고 난 후라서 괜한 공포까지 더해져서 더더욱 집 밖으로 나가기는 싫었다. 결국 라면을 찾았다. 베란다의 식료품 보관 상자을 열어 젖히면서 먹을만한 라면을 찾는데 집어드는 것마다 유통기한이 한참 지났다. 한 개 한 개 꺼내고 뒤적이는데 뻣뻣한 허리때문에 동작이 매끄럽지 못하다. 그 모양새를 선뜻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그 사소한 동작 하나조차도 버거울 몸 상태였다. 굽혀지지 않는 허리를 억지로 굽히며 멀쩡한(?)라면을 찾다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뒤도 볼 것 없이 쓰레기봉투에 라면을 처박아버렸다. 그 덕에 입맛은 싹 달아났다.


그 라면으로 말하자면, 서울에서 작은 구멍가게(진심 이 시대에 이런 가게가 서울 한복판에 있다고? 싶은 구멍가게이다.)를 운영하는 고모가 보낸 것이다. 늘 유통기한에 임박한 라면이며 온갖 식료품이며 근처에서 얻은 떡에다 쌀까지 바리바리 싸서 택배로 보내는데, 도착한 택배는 너무 무거워서 택배기사 눈치까지 볼 판이다. 그 택배가 도착한 날이면 엄마의 짜증과 한숨, 새된 목소리가 집안을 울린다. 그러면 당신 핏줄이 보낸 택배가 천대받는 것이 못마땅한 아버지가 한소리를 보태고 결국 엄마 입에서 ‘당신이 혼자 다 잡숴!’가 튀어나오는 것으로 고모택배 언박싱이 끝난다. 그리고 아버지가 나 혼자 다 먹겠다며 호언장담하던 라면은 자리만 차지한 채 고스란히 유통기한을 넘기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정작 아버지 당신은 진라면 매운맛만 드시는데 도착한 라면은 안성탕면과 삼양라면, 게다가지금도 이런걸 파나 싶은 '소고기면'이나 '해피면' 같은 것이니 입맛 까다로운 부친이 그걸 먹어서 없앨 리가 없고 그 모양새가 얄미운 모친은 처분도 안 하고 보란 듯이 모셔두는 것이다.      


그놈의 징글징글한 가난의 그림자다.

고모는 어린 시절에 서울로 상경해 그나마 시집 잘 간 언니 집에서 더부살이하며 식모노릇하다 어쩌다보니 혼기도 놓치고, 언니집에서 독립해 나와서는 독신으로 살며 구멍가게를 꾸려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렇게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작으나마 집도 사고 재산도 불린 고모는 평생 돈이라곤 써 본 적도 없고, 살던 동네에서 벗어나 본 적도 없다. 아직도 개를 한마리 끌고 다니며 동네 폐지까지 주워 모으는 , 알뜰을 넘어 청승이 몸에 밴 사람이다. 그러니 수억의 재산을 깔고 앉아서도 여전히 그모냥, 그 꼴로 살고 있는 고모는 제 오라비가 단칸방에서 땟거리 걱정 하며 살았던 그 시절에서 기억이 멈춘채로 딴에는 베푼답시고 온갖 허드렛거리를 싸서 보내고 오래비 집안의 평화를 깨는 것이다. 따지자면 세상 변한 줄 모르고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는 것인데, 그에는 오래비, 그러니 내 아버지의 우유부단이 한 몫 단단히 하고 있다.

     

- 오빠, 이번에 뭐 좀 보낼건데 드실거유?

- 보내. 보내. 없어 못 먹어.     


없어 못먹기는 커녕 입맛 까다로워서 안 먹는게 태반인 아버지시다. 그럼에도 늘 그런 식으로 이어지는 통화는 고모에게는 베풂의 뿌듯함과 엄마에게는 뻐근한 뒷골을 남기고, 컨디션이 안 좋은 날 내 눈에 띌 경우 <되물림 되는 징글징글한 가난과 청승>이라는 과한 확대해석을 낳으며 나의 짜증과 불안을  배가 시킨다. 그리고 내 손에서 쓰레기통행이다. 그렇게 쓰레기 봉지에 처박힌 라면은 이른 아침, 엄마의 손을 거쳐 알뜰하게 눌러담은 다른 쓰레기와 섞여 꽁꽁 묶여서 밖으로 내보내진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라면을 찾지 않는다.  




라면을 끓여 먹으려다 입맛은 싹 달아나고 쓰레기만 버렸으니 결국 맹물로 배를 채우고 겨우 잠이 들었다. 일어나 보니 몸은 쇳덩이마냥 천근만근에 몸무게가 또 늘었다. 근래 들어 일주일 사이에 5키로가 쪄버렸다. 무슨 포인트 적립마냥 따박따박 하루에 한근(약, 600g)씩 늘고 있다. 명백히 비정상이다. 잠은 못자고, 살은 찌고, 몸은 굳어가고, 그 와중에 창작 의욕은 안드로메다로 가고 있으니 뭐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아가 보자면 애초에 잠을 못 잤던 일이 있었고, 그 일을 시작으로 생활리듬이 꼬였다. 그러느라 피곤을 달고 살았고, 괜한 불안에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으며 덩달아 몸과 마음의 컨디션이 모두 바닥으로 내려꽂혔다.

누군가에게 단답형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를테면 ‘입원’ ‘수술’ ‘파산’ 같은 것. 다만 잠 못 들게 할 일은 머릿속에서도 생성되는 법이라 많이 힘들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아직 숨 쉬고 살아있으니, 늘 그래왔듯 또 방법을 찾고, 살 것이다.     


괜한 상념에 붙잡혀 감정적으로 스스로를 학대할 필요는 없다. 유통기한 임박한 라면을 보내는 고모나, 그걸 거절 못하고 받는 내 아버지나, 택배 박스 뜯으면서 군시렁 거리는 엄마, 그 삶의 모습은 그렇게 살아온 그들의 삶인 것인데, 지레 그 무리에 나를 섞어넣고 나도 고스란히 저렇게 늙어 갈까, 앞서서 마음 다칠 필요는 없다. 

    


지루하도록 별일 없는 날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별일 없이 살아있으니, 사는 동안 좀 괜찮게 살아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잠이 들고 싶어서 감기약을 집어 먹는 일부터 그만두었다.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고, 겨우 해 뜰 무렵에야 잠이 들었다. 그리고 중간에 잠이 깼다. 시간을 보니 세 시간쯤 잤다. 그 김에 일어나서 그대로 씻지도 않고 밖으로 나왔다. 작업실에서 청소기를 돌렸고, 밀어둔 영화를 한 편 봤으며, 화이트 보드에 무언가를 적었다. 그리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한 자 한 자 곱씹었으며, 지금 두서없는 글을 쓰고 있다.     





쇳덩이 같던 몸이 조금 가벼워진 것 같은 기분은 명백한 착각이겠지만, 그럭저럭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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