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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Oct 31. 2020

구체화 되는 슬픔이 싫을때, 문을 닫는다.

지나온 글들을 되짚어 보니 낯뜨겁기 짝이 없다.     


애초에 나 혼자 수다 떨 곳이 필요해 시작한 브런치였고, 그 목적에 충실하게 잘 쓰고 있었다. 그리고 혼자 떠드는 글에 호응해주고, 답글까지 달아주시는 친절한 분들까지 생겼다. 대중의 관심을 끌만 한 뚜렷한 주제와 목적을 가진 글을 쓰는 것은 아니기에 내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관심을 받지도 않았다. 딱 깜에 맞는 일이다.     


솔직함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규정하기 쉽지 않지만 나는 어느 정도 솔직한 사람이다. 거짓말을 잘 하지 않고 (귀찮다. 거짓말 수습하려 또 거짓말을 찾아내야 하는 과정이 귀찮다.) 굳이 마음에 없는 말도 어지간하면 하지 않는다. 내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다 진심이다. 그렇다고 모든 순간, 백 프로 솔직하기만 한 것인가? 반문한다면, 그러니까 ‘솔직’이라는 것의 정의를 ‘단 한 톨의 거짓도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건 또 그렇지 않다.

딱히 ‘쿨’ 하지 않은 마음을 감추고 ‘쿨’한 척 할 때라든가, 괜찮은 척 허세를 떨고 뒤에서 부들부들 떤다거나, 운다거나 뭐 그런 경우는 종종 있다. 다들 그렇듯 나도 그냥 보통의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힘들 때 글을 쓰다가 힘들 때 글을 멈춘다. 

스스로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일 때, 나는 그것을 버무려 글로 만들어 낸다. 입 밖으로 말을 꺼내듯 글을 꺼낸다. 그 동안 올린 글들이 그런 글들이다. 되짚어 보면 내가 쓴 글 안에 어느 한구석 맑은 구석이 없는 이유는 애초에 적당한 슬픔을 버무린 탓이다. 그러나 구체화 되는 슬픔이 덜컥 무서울 때가 있다. 정말로 슬픔에 잡아 먹힐 것 같을 때, 널어놓은 슬픔을 하나하나 세고 싶지 않을 때, 막연하던 무엇이 입 밖으로 꺼내면서 구체화 되는 것이 싫을 때, 나는 문을 꼭 닫는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곳의 풍경이다. 나는 이 사진을 찍기 위해서 ‘적당한’ 각을 찾고, 지저분한 물건들 몇 개는 프레임 밖으로 치워버렸다. 캔들워머의 불빛만 남겨두고 방안의 조명도 껐다. 그래서 탄생한 사진이 이 ‘적당히’ 아늑해 보이는 작업공간 샷이다. 


굳이 불빛 아래 훤히 드러나는, 곳곳에 묻어나는 삶의 조악함을 만천하에 내보일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이를테면 난방비가 아까워 방안의 온기를 잡아두고자 바닥에 깔아둔 촌스러운 이불, 얼핏 보면 인테리어 소품인 것 같지만, 정작 실체는 날이 추워지면서 차가워진 책상에 살이 닿을 때마다 소름이 돋아서 올이 풀린 무릎담요를 책상 위에 깔아놓은 것이라든가, 어딘가 오래 묵은 퀘퀘한 냄새가 떠도는 기분에 수시로 캔들을 켜 놓는 것, 엊그제 깨 먹은 그릇의 파편이 오늘까지도 맨발에 뾰족하게 밟히는 순간의 짜증, 환기가 잘 안 되는 주방의 냄새를 빼기 위해 현관문을 살짝 열다가 어젯밤 유튜브에서 본 강도 살인사건이 떠올라서 슬그머니 문을 닫고 킁킁 곰팡이 냄새를 맡으며 찡그러지는 얼굴. 이런 것들을 낱낱이 풀어낼 일이 뭐가 있을까. 그러나 이마저도 드러내고 쓸 수 있는 일이니 나열했을 뿐, 근본의 슬픔은 드러내고 싶지 않다.


나의 글은 딱 그 정도이다.      




아주 오래전에 주로 활동했던 인터넷 공간에는 <익명방>이 있었다. 나는 어느날 부터 익명방에 일종의 연재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닉네임을 걸고 글을 쓰다 보면 글이 글을 넘어서서 그 사람이 되기 시작하고 그에 대한 어떤 이미지가 고착된다. 속된 말로 팬도 생기고 안티도 생기는 것이다. 슬슬 그것에 지쳐가던 참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말보다는 글이 편했고 사람을 만나는 것 보다는 글로 소통하는 것이 더 즐거운데 그 몇 줌 안 되는 파생의 감정에 일희일비 흔들리기 싫었다. 그래서 익명방을 택했다.

   

일단 내가 누군지 모르고 나 역시도 댓글을 다는 이들이 누구인지 모르니 편견 없이 자유롭게 소통하고 즐기면 될 것이라는 생각했다. 반응은 예상보다 뜨거웠고, 익명방 ‘그년’에 대한 글이 메인 게시판에도 등장했다. 다음 시리즈는 언제 올라오느냐, 익명방 ‘그년’이 요즘 제일 재밌다. 등등 호평 일색이었다.

아, 왜 ‘그년’이냐면 내가 글 첫머리에 <안녕하세요. 그년입니다.>로 글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쓸데없는 흥행은 부작용을 불렀다. 어느 날 ‘그년’을 사칭한 사람이 생겼다. 익명방에 비슷한 글을 올리더니 누군가를 험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급기야 익명방이 아닌 곳에서 자신이 ‘그년’이라 커밍아웃을 해버렸다. 사람들은 괜히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많이 당황했다. 재미있는 놀이를 빼앗긴 기분에 마음이 썩 좋지 않았고, 누군가를 험담한 글 조차 내가 쓴 것으로 오해받는 것도 싫었다. 결국 내가 정체를 밝히면서 사건은 일단락 됐고 ‘그년’ 시리즈는 막을 내렸다. 

물론 나중에 개인적으로 전해들은 바로는 글은 지문과 같아서 짐작할 사람들은 정체를 짐작하고 있다고는 했다. 그걸 두고 자기들끼리 누군지 토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먼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험담은 내가 한 것이 아니었고 사람들은 커밍아웃을 한 그에게 험담에 대한 비난을 가할 것인데 왜 내가 나서서 정정했어야 했나 좀 머쓱한 일이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내 글을 다른 이가 쓴 것으로 빼앗기는 것이 싫었다. 별것없는 일개 인터넷 커뮤니티의 익명방이라고 하더라도 내 글이 누군가의 글로 둔갑하는 것이 싫었다. 내가 가진 유일한 자신감은 까만 활자로 이루어진 몇 줄의 글이었다.     


그때 그 공간에서 친하게 지내던 분께 사건과 관련된 그 묘한 감정을 하소연하니 그분은 내게 '그러니까 너는 천생 글쟁이야.' 라고 하셨었다.




오늘 메일함을 보니 어느 브런치 작가님께서 응원 메일을 보내주셨다. 아마 지난번에 올린 글, 그리고 일련의 글의 흐름에서 나의 ‘지침’을 읽으신 모양이다. 참으로 기분이 묘했다. 좋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고.

그래서 감사 답장을 쓰려다가 몇줄의 답장으로는 끝날 것 같지 않아 이 글로 대신하려 글을 시작했다. 


별것 아닌 수다를 제법 괜찮은 글로 읽어주신 것이 무척이나 감사하며 문득 힘이 됐지만 머쓱하고 부끄러워졌다. 내 '솔직'의 기준에서 뭔가 속인 기분이 든 것이다. 메일을 보내주신 작가님은 내게 <좋은 글이 아직 때를 못 만난 것>이라 하셨다. 그런데 나는 무척이나 게으르고 핑계투성이인 인간이다. 이 핑계 저 핑계로 무수히 많은 기회를 놓쳤고, 사람도 놓쳤다. 세월따라 켜켜이 쌓인 핑계가 만든 것이 지금의 이 모양이다. 일상은 후회투성이이고, 여전히 아프다는 핑계로, 가난하다는 핑계로, 뭣이 어떻다는 핑계로 일을 미루고, 툭하면 열등감에 잠수를 타 버리며, 그럼에도 관심이 고파서 글을 쓰는 사람이다. 뼈아픈 노력 대신 적당한 잔재주로 연명하던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제가 만든 슬픔이 싫어서 입을 닫는 사람이다.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잘 꾸며진 적당한 설정샷을 찍듯 적당한 글을 내놓고 솔직한 척 하는 중이다.


내 글은 좋은 글이 때를 못 만난 것이 아니라 딱 그만큼의 깜으로 만들어진 글이며, 더 짙은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알량한 잔재주로 정면승부를 회피하는 것이다. 반성문은 여기까지만 쓰겠다. 여전히 구체화 되는 슬픔이 싫어서 입을 닫고 있지만 나의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인 <내가 벌인 일에 남탓을 하지 않는> 마음으로 나의 남은 시간을 살아내려 한다.



메일을 보내주신 작가님과 그 밖에 별것 아닌 수다를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 인사를 전하며, 이놈의 빌어먹을 슬픔에 잠식되지 않도록 애써보겠습니다. 어쩌면 제 삶의 마지막 한 줄은 제법 괜찮은 글쟁이로 마무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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