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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Nov 08. 2020

나의 방은 추웠다.

나의 이야기.

작업실 원룸은 추웠다. 발끝에 닿는 바닥의 한기가 머리끝까지 타고 올라와 소름이 끼쳤다.




전기요금 고지서를 받아든 것은 어제였다. 아직은 가을이고, 추운 날은 많지 않았다. 그러니 매일 난방을 틀지도 않았고 난방을  틀었다고 해도 충분히 따뜻하게 지낸 것도 아니었다. 10월부터 가벼운 거위털 조끼를 걸치고 앉아 있었고 발이 차갑지 않을 정도만, 코끝에 닿는 방안의 공기가 시리지 않을 정도만, 딱 그 정도를 유지할 만큼 난방을 돌렸다. 그렇게 돌린 난방용 심야전기 요금의 고지서를 받아들고 잠시 당황했다. 고지서에 찍힌 금액은 가을날, 고작 그 정도 온기를 유지한 것 치고는 예상을 훌쩍 넘어버린 금액이었다.

덜컥 겁이 났다. 세상에, 돈이 무섭다는 말이 이것이었구나. 더 추워지면 어쩌지? 추울까봐 걱정이 아니라, 난방비가 걱정이었다. 누군가에게는 한 끼 밥 값도 안 되는 금액일수도 있는데, 나는 겁이났다.  그래서 어제는 보일러를 꺼 놓고 집으로 간 것이다.  정 추우면 엉뜨방석도 있고, 전기난로를 잠깐씩 틀면 되겠지, 아직 겨울도 아닌데 이 넓은 방을 굳이 다 덥힐 필요가 있나, 하루쯤 난방을 안 틀어도 뭐 큰일이 날까 싶었다.

     

그런데 오늘 나와보니 추워도 너무 추웠다. 몸은 경직되고 방 안의 서늘한 공기는 마음까지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버텨야 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쓸 만큼의 분량을 채우지 못했으니, 조금 혼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다그쳐야겠다고, 나에게 엄격해야겠다고 적당한 허세를 담은 이유를 찾았다. 목표했던 만큼을 다 써낸다면, 그래서 밥값을 했다면, 난방값을 했다면 맛있는 밥을 사 먹고, 난방을 틀겠노라고. 무언가를 이루어야 지불할 면이 설만큼 나에게는 밥값도, 난방비도 궁색했다.     


겨우 이것조차 부담이라면 그냥 방을 정리하면 될 일인데 그럴수는 없었다.

내겐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 가장 가까운 이들을 통해 명징해지는 것이라서, 오직 숨 쉴 곳이 필요했다.

나는 지금 숨쉬는 비용이 버거운 것이다.




다른 일을 하지 그랬냐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가끔은 나도 고개를 끄덕인다. 혹은 자조하듯 그때 그냥 다른 일을 했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진심으로 나를 설레게 하고, 내가 행복한 순간은 내가 좋아하는 글을 쓸 때, 무엇에 취한 듯 제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몇 시간을 타이핑 하는 그 순간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늘 가난하고, 다큐에서 만난 거리의 노숙자는 내 미래의 모습인 것 같았다. 그런데도 미련하게 부여잡고 놓지 못하는 이 일이 아니라면 나는 살 맛이 없을 것 같았다. 사실 놓아야 함이 성큼 현실로 다가왔음에도 나는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현실은 쌩깐채, 추운 방에 앉아 하얀 모니터만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그렇게 원한다면 이 순간에 오직 쓰면 될일인데도 그러지도 못했다. 두려움이다. 성큼 닥칠 끝자락의 두려움 때문에 하얀 모니터에 한글자도 띄우지 못했다. 나약하고 핑계많고 비겁하다.


새로 시작한 미니시리즈의 엔딩스크롤에서, 서점에 깔린 신간 표지에서, 어느 공모전의 당선자 명단에서 하나, 둘 아는 이름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그냥 슬그머니 지워지는 사람이 되었다. 담백한 축하 인사도 건네지 못하고 지독하게 겉도는 외로움도 견디지도 못하고, 스스로 지워지는 사람이었다.      


옛 친구들도, 잠깐씩 인연을 맺었던 이들과도 나는 나의 모자람과 가난을 견디기 어려워서 내가 먼저 연을 놓아버렸다. '나는 오랫동안 맴돌던 일에서 성과가 없어.' ‘돈이 없어.’ 라는 한마디가 얼마나 무겁고 부끄럽던지.


그런데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싶어서 추운방에 앉아있었다.                        


아래 글에 달린 어느 작가님의 댓글에 제멋대로 급발진을 해버렸습니다. 못난 자격지심이며 감추고 있던 부끄러움이 스스로 방아쇠를 당긴 꼴이었습니다. 감추지 않는다 하면서도 내 이야기를 그대로 끄집어낼 용기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의 이야기를 가져다 나를 달랬겠지요. 부끄럽고 난감한 이 해프닝이 제게 브레이크를 걸어주었습니다.     


잠시 다스림의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몸도 마음도 소통의 여유가 없습니다.

그런 이유로 이 글의 댓글은 접어두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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