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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Nov 13. 2020

아직은 가을이었다.

호수는 아직 가을이었다.   



지난 8월 이래로 한 번도 찾지 않았던 호숫가를 찾았다. 두어 달 만인 셈이다.

딱 한 바퀴를 도는데 예전 대비 두배 쯤의 시간이 걸렸다. 어디선가 읽은 대로 아랫배에 힘을 딱! 주고 어깨를 열고 시선은 15도 위를 바라보며 힘차게 걷는 걸음은 불가능이었다. 온몸이 각목처럼 뻣뻣해서 산책 삼아 걷는 정도의 가벼운 걸음조차 천근만근이었다. 질질 끌다시피 휘적휘적 한 바퀴를 돌고 나니 연체동물처럼 팔다리가 풀린다. 아우, 젠장.          




호숫가를 걷다 보면 낯익은 이들을 마주할 때가 있다. 서로 모르는 사이이고 눈인사 한 번 나누지 않았지만 눈에 익은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작년 봄부터 여름까지, 그 전 해 겨울, 또 그 전 해 어느 계절, 드문드문 호숫가를 찾을 때마다 자주 마주치는 사람이 있었다. 한쪽 몸이 불편한 그는 더운 여름에는 너무 더워 보이는 차림으로, 추운 겨울에는 너무 추워 보이는 차림으로 걷고 있었다. 불편한 한쪽 다리는 끌다시피 하며 나머지 한쪽 다리의 움직임에 의존해서 발걸음을 떼고 있었다. 어느 날은 길 한가운데 우뚝 멈춰서서 거친 욕을 내뱉기도 했다. 누군가를 위협하거나, 타인을 향한 욕설은 아니었다. 그냥 갑자기 멈춰서서 욕설을 쏟아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호숫가를 걷는 시간은 대략 비슷하게 정해져 있다보니 내가 그의 일상의 한 도막을 본의 아니게 엿보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평소보다 조금 일찍 호수로 올라가는 길에 그를 보았다. 나는 신호대기 중인 차 안에 있었고, 그는 걸어서 가는 중이었다. 그곳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호수까지는 2km는 족히 될 만한 거리였고 한참의 오르막을 올라야 하는 길이었다. 어디서부터 걸어오는 중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어딘가부터 걸어서 호수에 닿는 것이었다. 그리고 호수를 따라 조금은 느린 걸음으로, 어떤 날은 멈춰서서 욕을 하기도 하면서 걸었다. 내가 본 그의 모습이다.   




       

여전히 나는 사는 것 보다는 버티는 것이다.

그래서 지겹다. 무슨 의미가 있어서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인지 수시로 허탈하고, 막막하다.

그럼에도 꼬박꼬박 시간은 지나고 있으며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세상도 멈춰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럴수록 간극은 커지고 결국 상실감에 잠식되는 일들의 악순환의 반복일 뿐이었다.      


그러나 진심으로 놓을 것이 아니라면 일어나야 했고, 걸어야 했고, 뛰어야 했다.

몸도 마음도 무거워진 채로 가만히 누워서 허망함으로 하루를 채우고 싶지는 않았다. 한 줄을 쓰더라도 모니터 앞에 앉아야 했으며, 직시하고 똑바로 아파야했다. 그럴싸한 자기위안으로 달달한 좌절의 맛에 취하는 일은 하지 않아야 했다.     

감기 기운에 두통이 겹쳐 꼬박 이틀을 앓았다. 그리고 오랜만에 호숫가를 걸었다.





겨울일 줄 알았는데, 아직은 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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