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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Sep 18. 2022

어떤 이상한 가족의 이상한 작별 이야기(2)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남은 것은 모조리 서류뿐이었다. 사망신고서로 이 세상의 삶이 끝났음을 신고하고,

<사망> 혹은 <폐쇄>라고 쓰여 있는 각종 서류들로 사망을 증명해야 했다.


아버지의 빈소에서 큰 딸의 친한 언니가 말했다.      


“야, 상 치르고 정신없을 때 모든 절차를 빨리 다 끝내버려. 그래야 덜 힘들어.”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들었던 그 말이 뼈아프게 박힌 것은 약 한 달 후, 아버지의 사망신고를 한 이후부터였다.


빨리 끝내라. 그래야 덜 힘들다.

그런데 이 가족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가족이 사망하면 사망신고와 동시에 상속재산을 조회하는 서비스가 있다. 그에 따라 신청을 하고 안내문을 받았는데 듣지도 보지도 못한 집의 주소가 재산으로 등록되어 날아왔고 정작 이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은 목록에 없었다. 가족의 큰 딸은 시청에 전화해 사정을 물었는데 담당자는 계속해서 망자의 인적 사항을 물어댔고, 망자 소유의 재산으로 가족이 살고 있는 집 주소를 이야기하면서 뭐가 문제냐고 물어댔다. 세 번 말했다. 조회 결과 라면서 도착한 문서에 엉뚱한 주소가 도착했고, 정작 살고 있는 집은 목록에 없다고.     

 

또 망자의 인적사항을 묻는다. 그러더니 최**씨 명의로 **시 **동 ** 아파트가 있다니까요! 그것 말고 뭐 더 있어야 된다는 건가요? 최**씨는 돌아가셨다고요?     

결국 큰딸은 참지 못했다.


 “당신 말고, 상급자 바꿔.”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망자와 관계된 모든 것들을 정리할 때는 남은 가족 전부의 명백한 의사표시가 중요하다. 그것은 주렁주렁 매달린 많은 종류의 서류를 뜻하는 것이다. 특히 인감증명은 필수였다.


그런데 아버지의 둘째 딸은 등록해 놓은 인감이 없으며, 현재 인감 등록도 불가한 상태였다. 현행 법률에 인감을 등록하기 위해서는 신청자 본인이 관공서에 직접 출두해 구술로 자신의 주소와 이름을 명확하게 밝혀야 했다. 인감은 재산을 처분하는 데에 제일 중요한 서류이므로 절차가 엄격하고 까다롭다. 그러나 심한 장애를 가진 둘째 딸은 거동이 불가한 것은 물론 언어도 불분명하다. 다섯 살짜리 외국인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데, 그 말을 배운 소수인만 알아듣는 것과 같은 상태이다. 정상적인 절차로 인감 발급이 될 수가 없었다.       

   

달랑 하나 남은 집과 소액의 예금, 큰 딸의 보험이지만 계약자와 수익자가 아버지로 등록된 보험 하나를 처리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 가족은 몇 달 만에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절차를 이해하지만 처리할 일이 막막한 큰딸과 이 절차 자체가 납득이 되지 않아 ‘뭐가 그렇게 복잡해!’ 하며 짜증을 내다 급기야 신세한탄으로 이어지는 엄마는 부딪히기 일수였고, 아버지와의 회한 섞인 마지막을 기억하며 가급적 엄마와는 관계의 상처를 내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꾹꾹 눌러 참던 큰 딸이 어느 날 완전히 폭발을 해 버린 것이다.      


<도대체 누가 제일 억울하겠느냐고. 내가 낳은 자식도 아닌 동생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떠안고 맨날 돈 없다고 징징거리는 가난한 집구석에서 변호사든 법무사든 돈 주고 맡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나도 능력도 없는데 겨우 꼴난 대학 나온 죄로 다 내가 해야 되고. 이것저것 요구하는 건 많고 서류 뗄 때마다, 하다못해 핸드폰 하나 해지할 때도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동생은 장애가 있어서 직접 방문을 못 하는데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를 지겹도록 반복하는 건 나였다고.>    

 

그 후로 모녀는 한동안 말을 섞지 않았다. 큰딸이 엄마에게 말하기를 한 번만 더 신세한탄하면서 이놈의 팔자, 저놈의 팔자 징징거리면 내 장례 치르고 내 서류 떼러 다녀야 할 거니까 그렇게 알라는 말을 내던진 후였다.     


결국 이 가족은 나자빠지기로 했다. 당장 집에서 쫓겨나는 것도 아니니 그냥 살면 될 것이고 그러다가 차례차례 한 명씩 죽으면 누군가가 처리하겠지.     





그러다 그해 가을이 지날 무렵, 조금 냉정이 돌아온 큰딸이 법률구조공단, 시청을 쫓아다닌 끝에 둘째 딸의 일상 업무를 대신해 주는 후견인을 선정하기로 했다. 다만, 모든 것을 대신하는 성년후견인은 조건도 까다롭고 대상자가 정신감정을 받아야 하는 등, 절차가 복잡했다.


따라서 몇 가지 특정 업무만 담당하는 특정후견인으로 큰딸을 선임해 동생의 업무를 대신하게 하기로 하고, 시청과 장애인 단체의 도움을 받았다. 담당자라는 사람이 나타나 동생을 만나본 후 큰 딸에게 서류뭉치를 건네주고 떠났다. 자신들이 작성해야 하지만, 세부 내용을 모르는 타인이 쓰기는 어려운 내용이 많다면서 연필로 작성해서 보내면 자신들이 최종적으로 타이핑해서 제출할 것이라고 했다. 그 과정에서 동생을 돌보는 활동 보조사에게 제삼자도 후견인이 될 수 있다면서 한참을 설명하면서 은근히 신상 명세를 요구하였고 어리둥절한 활동 보조사와 그의 사이를 막아서며 불필요한 행위는 자제해 달라는 단호박까지 구사해야 했다.    

  

큰딸은 서른 장에 가까운 서류를 써야 했다.

당시 이른 아침에 출근하는 알바를 하고 있었으며 그와 별개로 다른 일도 잠시 병행하고 있었다. 본업(?)인 글쓰기는 계속 으로 남아있었다. 그는 서류 처리를 가능한 미뤘다. 제대로 마음먹으면 하루면 끝낼 수 있는 양이었다. 잠시라도 잊고 싶었다.     


그러나 삶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이번에는 엄마가 허리 디스크가 악화되어 걸을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수술대에 올랐다. 엄마가 입원해 있는 동안 활동 보조사가 돌아간 늦은 시간에 벌어지는 동생의 신변처리는 모두 큰 딸의 몫이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알바를 하러 출근하고, 다시 투잡을 뛰고 저녁에 들어와 몸이 불편한 동생을 지켜보고 똥오줌을 치워야 했다.      


그러던 중에 기회라고 생각했던 두 번째 일이 틀어지고 있었다. 상급자와 중간 상급자 사이의 기싸움에 큰 딸이 얽힌 것이다. 그의 능력을 존중했던 상급자의 지지로 일을 진행하던 중에 중간 상급자의 어깃장과 텃세, 제삼자의 월권 등이 겹쳐 일이 엎어졌고, 그 안에서 단순 계약직 신분이었던 큰 딸은 애매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지치기도 하고, 환멸도 들던 차에 큰 딸은 계약기간을 채우지 않고 일을 놓았다. 여담이지만, 그 이후 일을 진행시켰던 상급자는 물색없는 카톡질로 자신들이 하는 사업의 홍보영상이며, 보도자료를 스팸처럼 보내곤 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전화를 해서는 다시 일해볼 생각이 없냐는 소리를 했지만 건당 1000만 원 이상의 제대로 된 덩어리가 아니면 별로 생각이 없다고 했더니 소식이 없다. 그 이후에도 스팸 카톡은 계속되어서 난데없이 밤 10시에 유튜브 링크가 배달되곤 하였고, 큰딸은 그의 카톡을 차단했다.         




우여곡절 끝에 서류를 접수하고 지난한 기다림이 남았다. 법원의 판결은 해를 넘기고, 계절을 넘겨도 진척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의 사망으로 누군가에게 명의가 변경되어야 할 집의 취득세 고지서가 날아들었다. 취득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부동산의 세금을 납부하고 한 없이 법원의 판결을 기다렸다.      


마침내 재판기일이 잡혀 출석하라고 하더니, 다시 우편물이 와서 기일이 변경됐다고 한다. 장애가 있는 동생의 불출석 사유를 제출하라고 해서 등기로 발송까지 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전화가 와서 출석할 필요가 없단다. 씨바.....     


그리고 재판이 끝났지만 이주가 지나도록 판사가 판결문을 쓰지 않았다. 법원의 권위 앞에서 일개 시민은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판결이 났고, 큰 딸은 동생의 후견인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절차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후견 사항을 서류로 기록한 후 법원의 등기를 거쳐야 했다. 또 몇 주가 지났다.      

시청 담당자는 업무 내용을 전혀 몰라서 도리어 되묻고 있는 형국이고, 직접 법원에 전화한 끝에 등기가 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제 이 가족의 큰 딸이 둘째 딸의 인감을 등록하고, 발급받았다.


큰 딸이 둘째딸의 후견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서류와 그것으로 발급반은 인감(에는 후견인이 발급했다는 기록이 남는다.)

 




서류를 들고 은행을 가고, 보험회사를 찾았다.

망자(아버지) 기준의 기본증명서, 가족관계 증명서, 혼인증명서, 유가족 전원의 인감증명서 등등.

요청하는 것들이 참으로 많고 까다롭다.


그런데 보험회사에서 딴지를 걸었다. 후견인은 정해진 업무만 수행할 수가 있다. 그것이 법원의 판결문으로 명문화되는데, <상속의 처분에 관한 대리권>이 없다는 것이다. 후견인이 가족인 경우 이해관계에 따라 그 권한을 제한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험회사에서 애초 요구한 것은 방문하지 못하는 상속인의 인감증명이었고,  장애를 사유로 방문하지 못하는 둘째는 인감증명을 제출하면 되는 것이다. 큰 딸은 장애가 있는 동생의 인감의 등록과 증명발급의 권한이 있었다.           

이성의 끈이 끊어진 큰딸은 속사포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 보험의 피보험자는 나, 즉 망자의 큰 딸이다. 이 보험으로 인해 어떤 재산상의 이익이 실현되는 순간은 피보험자인 내가 죽거나 다칠 때이다. 보험료는 따박따박 내 통장에서 빠져나가고 있으며 현재 이 보험으로 인해 망자인 아버지가 얻은 이익은 없다. 일어나지도 않은 이익을 상정해서 그 권한을 상속하기 위해 이만큼의 서류 준비를 한 것으로 충분하다. 인감증명을 첨부할 경우 통화로 동의를 구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업무에 제약이 있을 수 있다. 는 당신들의 내부규정은 해석하기 나름이다. 그리고 애초에 이렇게 황당하게 수익자가 설정된 것은 보험을 가입할 당시 설계사가 우리에게 명확한 설명을 하지 않은 채 임의로 아버지를 계약자와 수익자로 설정한 것이 원인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자식보다는 부모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이 보편의 세상의 이치임에도 법정상속인도 아니고 아버지를 특정하여 수익자로 설정한 것은 피보험자인 내가 죽었을 때, 절차를 복잡하게 해서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으려는 계산까지 깔려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의심스럽다. 당시 설계사부터 절차상 문제가 없었는지, 고지를 정확하게 했는지, 근거 서류가 있는지, 필적 대조부터 전부 시작해 볼까?>          


약 30분 후, 보험회사에서 변경 승인이 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이제는 집이 남았다.

요청하는 모든 서류를 챙겨 등기소에 접수해야 했다. 그중에는 망자의  현재, 과거의 모든 제적등본(호적관계)이 첨부되어야 한다. 혹시 모를 숨어있을 수 있는 상속인 때문인데, 아버지의 호적은 물론 그 전 호적 (큰 형님) 그리고 큰 형님 이전의 호주의 호적(아버지의 아버지)까지 모조리 첨부해야 한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큰 형님의 호적에 아버지가 종속되어 있을 당시 배우자의 이름이 잘못 기입된 것이다. 현재 제적등본 상의 이름은 틀림이 없는데 형님의 호적일 때 성이 잘못 기입되어 있었다. 혼인신고 날짜도 동일한데 한**씨인 배우자가 한 곳에는 황**으로 기입된 것이다.

헛 걸음질 하는 것이 싫어 모든 서류를 강박적으로 살피던 큰 딸의 눈에 오류가 잡힌 것이다.     


큰딸은 엄마에게 물었다.     


“아빠는 같은 날짜에 성만 다르고 이름이 같은 두 여자랑 혼인신고를 한 거야? 엄마가 조강지처 확실해?”          


큰 딸은 아버지의 전 본적이었던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사정을 이야기하고 직권정정을 요청했다. 확인 결과 짐작했던 대로 과거 호적을 전산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담당자의 실수가 있었다고 한다. 정정될 때를 기다렸다가 다시 서류를 발급받고, 모든 서류를 몇 번씩 확인한 후에 등기소에 제출했다. 담당자가 확인했을 때 누락된 서류는 없었다. 이제 별문제가 없다면 아버지 소유였던 (그러나 사실은 대출금 갚을 때 엄마 돈이 더 많이 들어갔던 ) 집이 이 가족의 엄마에게 상속될 것이다.      




어느 옛 시절의 사람들은 부모의 묘 앞에서 움막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 끝에 탈상을 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오늘의 우리는 망자가 떠난 지 한 달 이내에 사망신고를 하지 않으면 벌금을 맞는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그 기간 내에 신고를 하고 온 가족이 손잡고 다니며 은행을 찾고, 보험회사를 찾고, 등기소를 찾을 것이다. 그것이 가족이었던 이와 이 세상에서 작별하는 마지막 시간일 것이다.      


꺼트리면 안 된다고 해서 밤잠을 설쳐가며 수시로 불을 붙였던, 그래서 일렁일렁 밤새 타오르던 향불 하나 없이, 한껏 보정해서 생전의 모습보다 훤하고 고운 사진 한 장 없이, 그를 둘러싼 꽃단 하나 없이, 냉정하고 차가운 기계적인 숫자와 문자로 이루어진 서류들이 마무리될 때 비로소 그는 이 세상에서 모든 역할을 놓고 돌아가는 것이다.      


재산을 두고 특별한 다툼이 없는 한 길어야 두어 달일 것이다.        

   

하지만 이 이상한 가족은 서로에게 잘해준 기억보다, 생채기를 남긴 기억이 더 많은 이 이상한 가족은 아버지와의 작별에 1년이 넘게 걸렸다.  재산다툼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금방 끝날 줄 알고 받아두었던 온갖 서류들은 기한이 다 되어 폐기해야 했다.

등기소를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기억하는 서류들은 제 역할을 다 했다.

여전히 이름이 남아있는 서류들을 쭉쭉 찢어 버리면서 마지막으로 당신의 이름 옆에 자리 잡은 <사망>, <말소>, <폐쇄>를 본다.             

 

2021년 7월 31일, 아버지의 시간이 끝났고 이제야 기록으로 남아있던 당신의 이름이 끝났다.


               



이 글은 큰 딸이 쓴 글이다.

그러니 둘째 딸이나 그의 모친의 입장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있을지 알 수 없다.

다만, 이 가족의 큰 딸은 날것으로 묘사된 저 울퉁불퉁한 부모와 동생을 사랑했고, 사랑한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잊고 있던 아버지의 음성이, 말투가, 몸짓이 떠올라 울컥 그리웠고, 쪼그라든 엄마가 안타까웠으며, 제 삶을 타인에게 의탁해야 하는 동생이 딱했다.     


사실 큰 딸은 엄마의 말버릇에 담긴 뼈아픔을 충분히 이해한다.

더럽고, 힘들고, 버거운 인생이다.


삶의 희로애락을 온전히 받고, 보내지 못하는 그것은 삶의 천형(天刑) 일 수도 있다.

사실 큰 딸, 그 역시 그러했다. 삶의 어느 순간마다 보통의 삶, 보통의 아픔, 보통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자신이 아팠다.          


그런데 이 가족의 큰 딸이 이 지루한 이야기를 이토록 상세하고 길게 남기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했고,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이제는 끝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눈물을 찔끔이며 말했다.     


“내가 배운 게 없어서,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라서 서러워. 너한테 다 떠넘기는 나는 편한 줄 알아? ”       

   

2022년 현재, 70을 넘긴 할머니가 큰딸이 했던 일을 막힘없이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건 자식의 몫이 맞다. 다만 간단하지 않았을 뿐이다. 큰 딸 기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전동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에게 도로상의 약 2cm의 턱은 백두산과 같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다.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어떤 이에게는 태산과 같은 일이다.     

마찬가지로 법과 제도는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다. 그래서 장애를 가진, 그래서 가족 안에서의 의사소통을  집 밖의 세상에서 증명받지 못하는 어떤 이상한 가족은 보통의 슬픔을 헤쳐나가는데 남들보다 조금 오래 걸렸다.     

 

그러나 결국 끝은 있다.                     

삶의 한 단락이 끝났으니 이제 빗장을 닫고, 다음 발자국을 떼어야 했다.

그리고 살면서 다시 마주할 슬픔, 외로움, 혹은 아픔 또한 어떻게든 끝이 날 것이다.     


지금 아버지의 시간이 끝났듯, 나도 이와 얽힌 시간이 준 일상의 핑계와 작별해야 한다.

그러나 그 시간을 잊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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