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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May 05. 2023

연.

   

언제부턴가 ‘손절’ 이 대세다.

원래는 더 손해보기 전에 이미 입은 손해를 감수하고 털어낸다는 주식용어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근래에는 인간관계의 끊어냄을 대체하는 단어로 자리잡은 모양이다. 

그 바탕에는 내가 ‘손해’를 보았으니 더이상 손해보기 전에 너와의 인연을 끊겠다는 현세의 흐름이 읽힌다. 


나는 주로 손절을 당하였던가. 손절을 하였던가.      

인간관계의 폭이 넓은 사람이 아니다 보니 무수히 많은 인연을 맺고 끊은 적이 별로 없지만, 시간의 흐름을 따라 누군가는 엮이고, 누군가는 떠나갔다.     

나의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세상에 있는지 지독한 의문이 드는데, 연 또한 (아니 특히) 그랬다.   

        



수학여행철이다. 


2014년 어느 봄 이후 괜히 마음이 저릿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학창시절의 한 토막임은 분명하다.      

가난하였다. 그러나 당연히 수학여행을 갔고, 그때마다 예쁜 새 옷도 입었고, 넉넉하진 않았어도 용돈도 받았다.  아빠가 운수업에 오래 발을 담근 터라 아빠 친구들 중에 관광버스 기사님도 제법 있었다. ‘너 누구 딸 아니냐?’ 하더니 대뜸 내 팔을 잡고 기념사진을 찍은 아빠 친구도 있었다. 벌써 이만큼 컸다면서 기특하다고 사진을 찍고, 용돈도 주셨다. 


당시에는 폰카는 물론, 디카도 없었고, 필름카메라도 흔치 않았다. 그래서 수학여행지마다 상주하는 사진사에게 돈을 내면 사진을 찍어주었는데, 나중에 어떻게 사진을 받는 건지 그 시스템을 정확히는 모르겠다. 아무튼, 학교를 통해 관광버스 기사 아저씨와 찍은 내 사진이 도착했다.;;     


친구가 많지 않았지만 왕따는 아니었던 것 같고, 옆자리엔 누군가가 있었고 여행 내내 함께 다닌 누군가가 있었으니 사진도 있었을 것이고, 밥도 같이 먹었겠지.  솔직히 그때 친했던 누구누구와 계속 연을 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품이 딱 고만큼이었거나, 연이 거기까지였거나.      


초등(국민)학교 1학년에 처음 만났던 j는 예쁘장하고, 공부 잘하고, 집도 부자였다. 그리고 나랑 참 친했다. 도대체 접점이라곤 없던 j와 내가 어떻게 친해진 건지, 어떻게 일년 내내 단짝이었던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5학년에 다시 만났지만 그 때는 전혀 친하지 않았다. 요즘말로 인싸였던 j는 점점 친구가 많아졌고 나는 나답게 점점 친구가 없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옆에 사람 많은 것이 불편하다.)     


다른 친구가 있었다. 이름이 너무 특이했던 친구 k는 5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이 시골 도시에서도 가장 빈촌에 살았던 그 친구의 집에 가려면 언덕을 숨이 차도록 걸어 올라가야 했다. 나 역시 가난하다 하였으나 그 친구의 형편과 비교조차 불가했다. 언덕 끝에 집이 있는데도 햇볕이 들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절벽을 깎은 곳에 들어선 무허가 판자촌이었던 것 같다. 양말을 기워 신었고, 옷은 늘 닳아있었다. 우리 집에 와서 넉살 좋게 점심을 먹고, 방바닥에 같이 엎드려 숙제를 했었다.      


k를 다시 만난 건 고등학교 때였다. 

수학여행을 가야 하는데, k는 가정형편을 이유로 수학여행을 가지 않는다고 했다. 굳이 감추지도, 감춰지지도 않았던 k의 가난은 이걸 아름다운 미담이라고 해야 할지, 책임감 없는 동정심의 발현이라고 해야 할지 헷갈리는 담임의 <십시일반> 제안으로 반 아이들의 k의 수학여행비 모금이 이어졌다. 그리고 k는 반 아이들 앞에 서서 눈물을 글썽이며 얼굴이 시뻘개진 채로 <고마워, 얘들아.>를 해야했다. 그러나 황당하게도 행정상의 절차로 (아마 모금이 너무 늦어서 인원 추가가 어려웠던 것 같다.) k의 수학여행은 불발이 되고 말았다,      

결국, k에게 상처만 남은 꼴이었다. k는 (일단, 겉으로라도) 주눅 들지 않는 아이였기에 훌훌 털어버리고 깔깔 웃었지만, 나는 반 아이들 앞에서 고맙다며 눈물 흘리던, 시뻘개진 그 친구의 얼굴이 내내 잊혀지지 않는다.      

j는 중 3때 같은 반이었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그저 반 친구 정도일 뿐 친구라도 하기도 뭣한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여차 저차한 사정으로 실업계 고등학교로 진로를 정했을 때, j가 슬그머니 옆으로 와서 말을 걸었다.      

“너 왜 상고 가?”

“그냥. 여고 가면 수학도 못하는데 꼴지 할 것 같아서.”

“......그러지 말고 다시 생각해봐. 너 다른 과목 다 잘하는데 수학만 못하잖아. 수학만 지금부터 공부하면 되는데 아까워.”     


성적순으로 학교를 선택하고, 그것이 한사람의 이력에 줄줄 따라붙는 것이 옳은가의 근본적 가치판단은 접어두고, 나중에 했던 나의 후회를 되짚어 볼 때, 당시 내 주위 어른도 하지 못했던 진지한 조언을 남겨준 그 친구의 말을 들을 것을 그랬나 생각한다.

예전만큼 친했더라면 좀 더 깊은 대화를 했을텐데 그땐 친하지가 않아서. ^^     


j는 특목고를 거쳐 의료계에 종사한다고 한다. 워낙 유명한 친구라 굳이 알려 하지 않아도 건너 건너 소식이 전해졌다.      


나의 삶의 울타리 밖으로 오래 전에 떠난 어떤 이들의 이름과 얼굴이 문득 스칠 때가 있다.           




죽고 못 살 것처럼 절친인 듯 하였으나 하루아침에 그야말로 '손절'을 당한 이가 있고,  내가 단 한톨의 마음 안의 걸림 없이 연락을 잘라버린 사람도 있다. 결과적으로 이쪽이나 저쪽이나 그렇게 될것이  잘 된 것이라 생각한다. 


피차 지독하게 무심해서 일 년에 한번 연락할까말까 한 인연인데도 20년을 넘게 이어진 친구도 있다. 그러나 어느 시절에는 따뜻한 응원 같던 말이 가식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다보면 삐딱해진 내 마음이 탓인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늘 진실하였는가 돌아보면 그렇지도 않아서 그 순간의 마음과 온기를 배배 꼬지 않고 담담하게 받는 정도로 내 마음을 정했다. 이것이 이어질 연이라면 이어질 것이고, 아니라면 말 것이고.     

어떤 관계이든 호들갑 떨지 않는 것이 지금의 내 마음가짐이다.


부여잡아도 놓칠 연은 놓치게 되고, 흘려보내도 파도를 따라 되돌아오기도 하니, 맺는 것 만큼이나 자르는 것도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을 아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만 그럴까. 

삶의 모든 것들, 하다 못해 애착하던 우산 하나, 비가 그쳤다고 그만 까맣게 잊은 탓에 영영 잃어버렸다. 그러나 비가 쏟아진 다른 어떤 날, 마침 주인 잃은 우산 하나를 집어간 이는 내가 애착했다던 낡은 우산과 고마운 연 하나를 맺었겠지.



때가 있고, 흘러가고, 맺혔다가 풀어지고.

그러다 보면 어딘가에, 누군가와, 무엇과 함께 닿아있을 것이다. 뭔지 알 수는 없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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