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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Sep 04. 2023

나를 몰아치는 공복의 정체성.

파마를 했다. 일명 '사자머리'. 어흥.

너무 지루해서 그랬다.

처음 가보는 미용실이었다. 

미용실 원장과 스타일에 대한 의견이 갈렸다. 

나는 단정해 보일 필요 없고, 더워 보여도 괜찮으니 컬이 풍성한 사자머리를 해달라고 했다.

원장은 머릿결도 상할 수 있고 깔끔하지 않을 것인데 그보다는 자연스러운 컬이 예쁘지 않겠냐고 했다.

나는 부스스해도 괜찮다고 했다.  폭탄도 좋고, 사자도 좋다고 했다.


나는 정갈하고 단정한 머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적당히 뻗치는 머리도 좋고, 제멋대로 날아다니는 것도 좋다. 미용실에서 마무리를 할 때에도 ‘금방 미용실에서 나온’ 것 같지 않게 해달라 부탁한다. 전문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처럼, 촉촉한 헤어제품 티 나지 않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인생사 멋대로 되는 것 하나 없지만, 머리카락이라도 제멋대로 살고 싶은 욕망 아닐까 생각한다.     

     



(마침 미용 제품 샵을 운영하는 친구가 샴푸를 보내줘서 인증하느라 머리 사진을 찍었었다. 머리가 이 꼴이라 샴푸는 매우 땡큐라고!  )   




집에서 작업실 까지 고작 걸어서 10분이다.

그러나 지금의 작업실을 꾸린지 만 3년이 지났지만, 실상 거의 걸어본 적이 없다.

여름엔 더워서 겨울엔 추워서 봄에는 황사 때문에 가을엔 마음이 허해서...등등. 

그러다가 걸어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8월 중순 쯤이었을 것이다.

여름이 물러가기 전이라 덥고 뜨거웠다. 


아침에 일어나 간단히 세수만 하고, 선크림을 찍어 바르고 매일매일 걸어다녔다. 

그리고 요즘에는 근처 체육공원 트랙을 10바퀴쯤 걸어서 도는 것을 추가했다.      

산과 맞닿은 체육공원은  풍경이 지루하긴 해도, 걷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어느 날, 그 곳에서 뱀을 보았다.

작은 새끼뱀인 것 같았는데, 바위 틈에서 꼬물꼬물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꿈틀거리는 생명체를 좋아하지 않으니 기겁을 하고 물러났지만 내내 신경이 머물렀다.      


‘쟤는 왜 도망가지 않고 저기서 저러고 있을까?’      


트랙을 10바퀴쯤 도는 동안 몇 번을 기웃거렸다. 용기를 내서 조금 가까이 다가갔는데 누군가 뱀의 머리를 돌로 눌러놓은 것이었다. 그러니 도망도 가지 못하고 돌에 눌려 몸을 뒤틀고 있는 것이었다.     

그 잔인함에 치를 떨었지만 차마 치워줄 용기는 나지 않았다. 내 잘못은 아니지만, 그래도 못내 마음이 아팠다. 며칠 후에 다시 살펴보니 흔적이 없었다.      


어떻게든 되었겠지.      

그래도 마음 깊이, 진심으로 그 작은 뱀이 몸을 누르던 돌을 벗어나 풀숲으로 갔기를 바랐다.      




살이 올라도 너무 올랐다. 이럴수가 있나 싶도록 역대급 몸무게를 갱신하는 중인데, 도통 알수가 없는 일이다. 실제로 많이 먹지도 않으며 폭식을 하지도 않는다.  단 것이 당겨 작은 초콜릿을 한 개 샀지만 다 먹지를 못해서 냉장고에서 3일째 자고 있다.  즉, 많이 먹어서 찌는 편은 아니다.

그렇다면 활동량? 

전에 없이 매일 걸어 다니고, 체육공원 뺑뺑이까지 하는 중이니 활동량은 늘었는데, 어째서?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내가 나의 정체성을 쌩까는 중이라서.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 때, 나는 지독하게 예민하다. 

배가 부르면 일을 할 수가 없어서 글에 집중해야 할 때는 어지간하면 먹지를 않는다. 

공복 상태의 허기짐이 글을 채우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배불러서 졸리거나 몸이 무거워 지는 불쾌함을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에너지를 썼다.      

그 상태를 오래 잊었다.    

  

최근에 의뢰받은 일이 하나 있어 며칠 안에 원고를 넘겨야 한다. 

오늘 오전부터 내내 공복이었다.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무리할 필요는 없어서 서너 시간만 바짝 집중하고, 나머지는 내일 중으로 마무리할 생각이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데, 나 혼자 바삐 해낸다고 일정이 당겨지는 것이 아니므로 적당히 조율하며 개인 작업과 병행하는 중이다.      


아무튼 오늘 할 분량을 마치고 집에서 대충 싸 온 주먹밥으로 늦은 아침, 점심을 떼웠다. 

<일도 제대로 안 하고 있으면서 어디 맛있는 것을 먹겠다는 건인가! >하는 염치로 인해 당분간 주먹밥을 먹기로 했다. 

6.25 전쟁 때처럼 소금만 넣어 뭉쳐올까도 했으나, 그건 좀 너무하다 싶어서 간단히 뭉쳐왔다.      


빈속에 커피만 들이부으며 자판을 두드리다 보니 오히려 정신이 말끔해졌다.

그래, 이 맛에 이 일을 했었지.      


19시간을 꼬박 앉아있었던 적도 있고, 하루에 30장을 써 댄 적도 있다. 몸은 고달팠지만, 나는 즐거웠다.      

이리저리 헤매봐도 정체성은 글쟁이인 모양이다.

헛헛함을 달래느라 애먼 곳에 마음을 둘 일이 아니다.

나를 몰아치는 정체성을 잊지 않을 일이다. 




오늘은 허리통증 때문에 한 달을 쉬었던 요가수업을 갈 생각이다. 

요가도 배부르면 힘든 운동이라. 적당히 배고픈 날에 맞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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