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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Aug 16. 2023

타박타박, 그리고 정리되는 것들.

    

생전 나의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종종 노래를 불렀다. 

그중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했던 것이 <나그네 설움>이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국마다 눈물 고였다

선창가 고동소리 옛님이 그리워도

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타관 땅 밟아서 돈지 십 년 너머 반평생

사나이 가슴속엔 한이 서린다

황혼이 찾아들면 고향도 그리워져

눈물로 꿈을 불러 찾아도 보네     

낯익은 거리다마는 이국보다 차가워

가야 할 지평선엔 태양도 없어

새벽 별 찬서리가 뼈골에 스미는데

어디로 흘러 거랴 흘러갈쏘냐  

        

나그네 설움  / 백년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로 시작하는 노래는 아버지, 당신의 회한을 듬뿍 담은 듯 절절하고 서러웠다. 아버지가 노래를 부를 때의 특유의 억양과 강세까지 기억이 나는데, 힘을 주는 지점과 힘을 빼는 지점은 원곡 가수의 그것과는 상관이 없었다. 나의 아버지는 지이- 나아온- 하며 ‘지’와 ‘나’에 특히 힘을 주어 노래를 불렀다. 지나온 길을 아무리 더듬어 본들 되돌릴 수 없음을 나의 아버지는 알았던가, 아님 몰랐던가.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가사의 내용과 상관없이 아버지가 부르던 노래의 첫 소절이 떠올랐다.

아무도 모르게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집에서 작업실까지 10분 남짓이 걸린다. 차로는 2분이다. 그 짧은 길을 늘 차를 타고 다녔다.

춥거나 더웠거나 비가 왔거나 이유는 다양한데, 본질적으로 귀찮아서였다. 

걷는 것이 귀찮은 것보다는 걷기 위한 과정이 귀찮았다.      


나는 눈곱도 떼지 않고 집을 나설 때가 많았다. 누군가를 마주치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맥도널드 드라이브 스루에서 맥모닝을 사서 작업실 책상 앞에 앉아 아침을 때웠다. 간단히 과일에 유유라도 마시는, 그리고 세수라도 하고 집을 나서는 것, 그 조차 귀찮았다. 

그리고 혹시라도 있을 변수에 대비하기 위해 (갑자기 아프거나, 급히 무엇을 사러 가야 하거나 등) 차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음에서 주장했다.)     


그러다가 불쑥 걷기 시작했다. 

허리가 너무 아팠다. 일부러 오기가 나서 더 걸었다. 이대로 나를 주저앉힐 셈인가? 그렇게는 못하겠는데? 

시간은 평소보다 오래 걸렸다. 절뚝절뚝 걸었다. 

때 맞추어 태풍이 지났으니 살갗에 닿는 공기가 달라졌다. 

시간의 흐름은 머뭇거리는 법이 없다.     


요가 수업을 가는 날은 차를 가져와야 했는데, 허리통증 때문에 요가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걸어 다녔다. 세수를 하고, 선크림만 바른 후에 선글라스를 꼈다. 집 앞 슈퍼나 편의점에서 커피를 하나 사서 입에 물고, 타박타박 느릿느릿 걸었다. 교회 앞에 불법 주차를 하는 아우디 차량은 안전신문고로 신고했다. 내가 본 것만 벌써 여러 번이다. 아우디잖아. 기억이 날 수밖에.     


비어있던 가게가 새 단장을 하려는지 공사로 분주하다. 이곳에 작은 카페가 하나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작업실 근처 편의점은 사장님이 세 번쯤 바뀌었는데 지금 사장님은 처음엔 지나치게 친절해서 부담스럽더니, 요즘은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으신지 늘 우당탕 탕탕 집어던지고, 신경질적이다.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한다. 작업실에 생수가 떨어져서 사러 갔더니, 사장님이 또 우당탕 중이다. 


생수 6개 묶음이 2000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이 문에 붙어있길래 사장님의 우당탕이 멈추기를 기다려 저건 어떤 것이냐고 물었더니, 똑같은 생수라고 한다. 그래서 어디 있어요? 했더니 햇빛을 받으면 좀 그래서 덮어놓은 것뿐이지 똑같은 생수라고 한다.     

 

?????    

 

어디 있는데요? 

그제야 덮어놓은 천을 걷어준다....저는 투시력이 없습니다.   


조금 불편해져서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 진다. 그런데 갈 곳이 없다.   

근처에 편의점이 두 개인데 반대편 편의점은 지난겨울 이후로 발을 끊었다. 사실 물건은 그쪽이 더 다양하고 좋은데.


자주 갔더니 얼굴을 익혀서  친해졌다고 생각했는지 60대로 보이는 남자 사장님이 밝은 얼굴로 말을 걸었다.     

“애기는 언제 낳아요?”     


뱃살입니다만. 씨바. 

나는 지독하게 옹졸한 사람이라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는다.      




작업실에 도착하면, 환기부터 시킨다. 그런데 옆집 어르신이 텃밭에 거름을 뿌렸다. 환기를 시키려고 창문을 열었는데 거름냄새가 배어든다. 아....미치겠다. 

별 수 없어서 향을 피우고 창을 열었다.      

향이 타는 동안, 노트북을 켠다.    


 

그리고 미뤄둔 것들을 시작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내 노트북 안에 잠들어 있던 것들을 꺼내 제대로 세상에 내놓을 준비를 해야 했다. 간단하게 엑셀파일로 정리를 하는 중이다. 더불어 일상루틴을 체크하는 중이다. 구체화가 필요했다. 그러다 보면 하나씩 가닥이 잡힐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만큼 좋아하는 일이 없다. 그러니 어쩌나. 제대로 해야지.     

노트북 하드를 발굴하면 더 쏟아질 것이다. 시작하다가 멈춘 것들이 어마어마하다. 가끔 나도 놀란다. 내가 이걸 썼었나? 하고.      


왜 이렇게 멈칫멈칫 멈추고, 또 멈추었던가.


내가 쓰는 글은 긴 호흡이 필요했다. 뚜렷한 목표를 두고, 수많은 갈등을 헤쳐가며 끝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돌아보지 않는 단호함과 여러 가지 가능성을 품는 유연함, 그리고 멈칫거리지 않는 직진이 필요했다. 나는 무엇이 무서웠을까? 역시나 실패할 것이라는 섣부른 좌절과 이미 늦었다는 비겁함이 뭉친 큰 바위가 내 앞을 막고 있었다.      


슬픔을 구체화시키고 활자화시키는 글쓰기를 멈추기로 했다.

대신 내가 쓰고 싶었던 이야기를 구체화시키는 일에 집중하려 한다.   

                  



걷다 보니 불필요한 것들이 정리가 되었다.       


해가 뜨겁기 전에 나오고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아직 여름이 다 물러가지 않았다. 한낮은 여전히 뜨겁다. 그러니 해가 오르기 전에 걸어야 했다. 또한 세월이 하 수상하니 굳이 위험을 감수하며 늦은 밤거리를 걸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분명해졌다. 힘없이 흘려보내기엔 억울하다.      


가방 안에 무거운 것들은 넣지 않고, 무엇을 빼먹었다고 해도 그것이 꼭 필요하고 소중한 것이 아니라면 굳이 돌아가지 않는다. 어제는 이어폰을 놓고 왔지만, 돌아가지 않았다. 길가의 소음과 골목길에 울리는 내 발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못생긴 신발을 신는다. 

조금이라도 딱딱한 신발은 허리에 무리가 된다. 그래서 예쁜 샌들도 구두도 신지 못했다. 

못 생기고 투박한 운동화를 매일 신고 다녔다. 보이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덜 아픈 것이 먼저였다.      


굳이 당장 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은 마음에 두지 않게 된다.

해야 할 일이 하기 싫어서 괜히 가위를 사러 다이소에 간다거나, 다음에 가도 되는 곳에 충동적으로 당장! 가는 일 등을 하지 않게 된다. 자동차가 주던 기동성이 사라진 자리에 신중함이 깃들었다.     


                

걸으면서 만나는 것들.  (마지막 사진 출처: 다음 로드뷰 캡처)

타박타박 걸었다. 

소중하지 않은 것들은 걸러내고, 불필요한 것에 집착하지 않으려 애쓴다.

마음을 분산하지 않고, 직진한다.      

결국, 닿아야 할 곳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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