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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Aug 10. 2023

말과 글을 아낄 순간.

 

예전에 굉장히 불쾌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어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알게 된 분이 집요하게 연락처를 요구했다.

나는 인터넷 세계의 인연은 인터넷 세계의 인연이라 생각해 웬만하면 관계를 확장하지 않았다. 

오프라인 모임에서 만나더라도 그때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그뿐, 굳이 연장전을 하지 않는 것이다.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지는 각자의 판단이니 나의 생각이 꼭 옳다고 하지는 않겠다. 

다만 나의 성향은 그렇다는 것이고, 나는 그렇게 관계 규정을 하는 것이 편했다.      


그분이 이성이었다면, 나의 매력에 빠진 것이라 착각(?)이라도 할 텐데, 그렇지도 않았다. 그 분은 나보다 나이가 조금 많은 여자분이었는데, 어느 지점에 나한테 꽂힌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내가 글을 올릴 때마다 따라다니며 댓글을 달았고, 쪽지로 안부를 물었다.      

그러나 그 댓글이라는 것도 내 글에 대한 감상이나 자신의 생각을 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사를 늘어놓기 일쑤라 (아침을 뭘 먹었고, 남편은 오늘도 술을 마셨고, 애들은 말을 안 듣고 등) 뭐라 답을 하기도 애매했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일상사를 공유하더니 나와 친분을 쌓았다고 생각했는지 잔소리도 늘어놓았다.  ‘우리 **님이 도대체 뭐가 모자라서 시집도 못가는 건지.’ 라든가 ‘ 아침에 커피 마시지 말고, 따뜻한 물을 마셔라.’ ‘밤에는 과식하지 마라’ ‘더 나이들면 봐줄 사람 없으니 지금이라도 누구든 만나라.’ 든가.


그러더니 어느날부터 ‘목소리가 듣고 싶다.’ 고 했다. 나름의 원칙을 이야기 하면서 개인 번호는 알려주지 않는다고 했더니 ‘서러워서 눈물이 난다.’ 며 ‘연락처를 알려달라. 목소리만 듣고 싶다. 잘 지내는지 궁금하다.’ 고 했다.      


나는 그 어떤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았고, 그 공간에서 내가 탈퇴하면서 그분과의 징글징글한 연은 끝이 났다.      


짐작컨데 ‘다 너 잘되라고 잔소리하는 언니’ 포지션을 원하셨던 모양이다. 지지고 볶더라도 남편이 있고, 말을 안 듣더라도 세상 소중한 아이가 있는 자신의 삶을 나의 결핍(이라고 혼자 생각하신 듯)을 통해 더 나은 삶이라 위안받고 증명받고 싶었던 것도 같다.      




그리고 어찌 연락처를 아셨는지 불쑥 연락을 하신 분이 한 분 있었다. 

그 공간에 가입하기 전에 오프라인에서 이미 친분이 있었던 지인을 통해 번호를 따(?)셨다고 나중에 들었다.      

그 분은 위의 사례와는 달리 번짓수 잘못 찾은 잔소리를 하거나 자기 신세 한탄을 늘어 놓지는 않았다. 가끔 글이 뜸하면 안부를 묻는 정도였기에 나도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뭘 좀 보내려고 하니 주소를 알려달라고 문자가 왔기에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나 그냥 노트가 좀 많아서 보내주고 싶다고 부담 갖지 말라고 하면서 재차 문자를 하기에 거절하기도 뭣해서 주소를 알려드렸다.      


그리고 도착한 택배에는 그해 달력(그때가 가을이라 한 두어달 남았을 것이다.), 딸이 쓰던 것이라면서 쓸어 담아 보낸 철 지난 다이어리, 진심 색이 바랜 노트 몇 권, 사은품으로 받았을  두서없는 화장품 샘플이 한봉지, 싱크대 서랍안에 잠들어 있었을 것 같은 초콜릿, 과자, 사탕 등이 주방용 비닐백에 담겨 도착했다.   

   

그대로 탈탈 털어 쓰레기봉투에 담아 내다 버렸다.           


글은, 단편적이다. 글이 그 사람을 나타내는 것도 맞지만 그것이 곧 그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종종 타인이 쓴 글의 어느 지점에 꽂혀 급발진을 하는 이들이 있다. 


음, 얘는 가난하구나. 도와주고 싶다. 뭐든 주면 잘 쓰갰지? 하며 주워담았으리라 짐작한다.


명백히 <가난한 무명작가> 는 맞지만, 남이 버린 화장품을 주워 쓰지는 않으며, 결혼을 못했는지 안했는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현재 배우자가 없긴 한데, 결혼 한 것이 세상 벼슬이라도 되는 양 <결혼도 못하고>를 운운하면 더 독한 말로 돌려 줄 수도 있다. 물론 그러지는 않았다. 


내가 글로 주둥이(?)를 턴 탓이려니 하며 입을 다물었다.      



        

나는 요즘 어이가 없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실패자의 증명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지 멀쩡하다가도 멍하다.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다른이와 다를 것 없이 누구나 맞이하는 삶의 파도를 맞는 것이니 별날 것은 없다. 그저 파장과 색깔이 다른 것이다. 모두의 행복이 같은 색이 아니듯, 모두의 좌절이 같은 색은 아니다.      


빚지고는 못 사는 사람이라 5000원짜리 커피 한 잔을 얻어마셔도 다음에는 내가 사야 마음이 편한 사림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다면 늦더라도 갚고, 진심으로 감사함을 전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데 가끔 제멋대로 추측해서 쓰레기를 투척하면, 나는 그저 입을 닫고 싶어진다.        

   

어디선가 보았다.      

슬픔을 나누면 ‘약점’이 된다고.     


그래서 일상에서 입을 다물었다. 대신 글을 좀 썼다. 

그런데 그것이 맞는지 살짝 생각이 많아진다. 




물론 이 공간, 브런치에서는 상처받을 일도 없었고, 무리한 동정을 던지는 분들도 없었다. 

못생긴 내글을 좋아해주는 감사한 분들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조심스럽다.

사실 객관적으로 어떤 목표에서 밀려난 이가 끄적이는 글이, 빛날리는 없지 않는가.



나를 희미하게 바래게 하는 것은 무엇도 아닌 나였으니, 글도 말도 아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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