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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Sep 08. 2023

글쓰는 사람, 자의식 과잉을 경계하다.

*미리 밝혀 두건데 나에게 보내는 ‘다짐’ 이 담긴 이야기이다.  

      


‘니 애는 너만 예쁘다.’ 라는 말이 있다.  ‘아이’를 내세워 과한 요구를 하거나, 아이의 무례한 행위를 방치하면서 ‘애니까.’ 라며 사과도 양해도 없는 부모를 저격하는 말로 주로 쓰인다.           

개인적으로 나는 아이는 예쁘지만, 아이가 무섭다.


???


아이를 낳아본 적도, 길러본 적도 없는 사람이라 그 작은 생명체가 행하는 모든 것이 낯설고 조심스럽다. 또한 유아 특유의 하이톤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기 일쑤다. 다만 아이는 아직 모르는 것이 많은 것이 당연하고, 아이의 작은 실수나 뜻하지 않은 공격(?)에 대해 다 크다 못해 늙어가는 어른인 내가 사람 대 사람으로 대응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 아이의 창조자(?)는 이야기가 다르다.  그래서 애는 그래도 되지만, 너는 그러면 안된다고 하지 않는가.


예전에 기차를 타고 이동할 일이 있었는데,  아이 엄마와 대여섯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내 앞자리에 탔다. 아이는 창밖으로 스치는 모든 풍경에 대해 ‘저건 뭐야?’를 연발하더니 드디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목적지까지 1시간 반쯤이 남았는데, 아이의 노래는 1시간이 지나도 멈출 줄을 몰랐다.      


피곤에 절어 겨우 설잠을 자고 있었는데, 나의 귓가에 ‘참새’ ‘오리’ ‘햇님’ ‘꽃’ ‘반짝반짝’ ‘총총총’ ‘종알종알’ ‘예뻐요.’ 등의 낱말들이 또박또박 때려박혔다,


아이의 노래가 끊이지 않았고, 기차 안은 흡사 아이의 재롱잔치같은 형국이었다. 얼마 후 건너편 자리에 앉은 할아버지가 아이더러 몇 살인지, 어느 유치원 다니는지를 묻고, 아이 이름도 물었다. 귀여우셨나보다.  

아이는 또박또박 대답하고 더욱 신나서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이제는 아이 엄마가 박수를 치며 같이 노래를 시작했다. 얼씨구.     


끊임없이 노래를 부르던 아이가 잠깐 숨을 고르는 틈에 몸을 일으켜 아이에게 물었다.     


“아가야, 이름이 뭐라고?”

“김**(반말이다.)”

“아, **이 구나? 어린이집 다녀?”

“응! ##어린이집!”

“그렇구나. 어린이집에서 사람 많은곳에서 큰 소리로 노래하고 떠들면 안 된다고 안 배웠어?”     


아이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제 엄마를 쳐다보았다.

아이의 엄마는 나를 훽 째려보더니 아이에게 조용히 하라며 신경질을 냈다.

방금전까지 박수를 치며 노래를 따라부르던 엄마가 왜 제 자식에게 신경질을 내는가?

자기 자식을 혼내면 내가 미안할까봐 그랬을까?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 나는 나에게 찾아온 평화가 감사할 따름이었다.           




글을 쓴다.

수익도 얼마 안 되는 무명작가지만, 종종 돈을 받고 글을 쓰니 나도 프로작가이다.

또한 이런저런 공모전에 낼 작품을 준비하거나 상업화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쓰는데, 이 경우 내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을 때가 훨씬 많다.

그래서 번번이 공모전 출품을 포기하거나, 글을 달라는 제안을 거절해야 했다.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글을 마구잡이로 던질 수가 없어서 그런 것이다.

어느 쪽이든 구매자(?)가 돈이든 시간이든 지불할 가치가 있는 것이어야 제 몫을 하는 것이다.

그 압박감을 견디기가 힘들어서 본업을 좀 소홀히 하기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브런치에 후딱 올려대는 글은 살짝 느슨한 글이다.

맞춤법도 엉망이고, 오타도 작렬하며 소위 말해서 ‘의식의 흐름대로’ 쓰는 경우가 많다.

굳이 아무도 묻지 않은 하루 일과를 적기도 하고, 신문사에서 나에게 지면을 할애해 주지 않으니 그냥 나 혼자 사회현상에 대해 쫑알쫑알 떠들기도 한다.      


이렇게 쓰는 글에 독자의 정성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그럼에도 잘 읽었다고 해 주시면, 감사할 따름이다.      




어느 때 보다 작가가 많은 세상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유튜브를 보자. 더없이 많은 ‘작가’ 들이 활동 중이다.

남의 글을 적당히 ‘우라까이’ 한 책을 낸 후 ‘작가’ 타이틀을 걸고 방송을 하는 이들이 있다. 책을 읽고 책을 썼더니 부가 따라왔다는 결론은 빠지지 않는다.   

  

‘우라까이’란 일본어에서 유래한 속어로 주로 방송, 신문 등에서 다른 기사나 창작물을 바탕으로 적당히 재조합 하는 행위를 말하는데, 표절이나 카피와는 조금 결이 다른 말이다. 이를 칭할 적당한 우리말이 없어 부득이 그 표현을 그대로 가져왔다. 중요한 것은 이를 행하는 이들이 표절과 카피와는 달리 이 행위를 부끄럽거나 무겁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연한’ 줄 안다.      


그런 창작물들이 세상에 나오고 창작자를 작가로 만든다.      


예전에 <가난한 가족> 이라는 제목으로 이야기를 구상한 적이 있다. 가난한 가족이 부잣집으로 숨어 들어가 사기를 치는 내용인데, 반지하에 사는 이 가족이 옆집 와이파이 훔쳐 쓰는 장면이 참으로 기발하다며 혼자 생각했었다. 여차저자 하다가 어떤 흐름이 완벽하지 않아, 진전이 없이 노트북 하드에 잠들게 되었는데 몇 년 후에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세상에 나왔다.      


아, 봉준호가 나의 무의식에 침입해 <와이파이> 장면을 훔쳐갔구나! 하고 생각했다면 나는 병원에 가야 할 일이다. 그저 속이 좀 쓰렸으나 완성도를 높여 더 일찍 세상에 내놓지 못한 내 탓이고 <가난한 가족>은 세상에 나오기 힘들어졌다는 것, 특히 와이파이 장면은 쓸 수 없게 되었음을 되새겼을 뿐이다.


아무리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해도, 아주 작은 디테일 조차 오리지널리티를 추구하는 것이 창작자의 숙명이다. 온 신경이 날카롭다. 이러다 보니 또한 부작용이 있는데, 세상 내새끼가 제일 귀하다. 그렇지 않겠는가? 금이야 옥이야 혹시 누가 훔쳐 갈까 불안하다. 이보다 더 예쁜 아이가 있을까? 이 아이는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게 만들어낸 내 새끼인데, 어떻게 흠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기차 안에서 한시간을 노래하는 딸과 함께 노래를 부르다가 제 딸에게 은근히 주의를 준 다른 승객을 째려보는 적반하장을 범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니 새끼는 너만 예쁘다.      


예전, 글을 배울 때 합평이라는 것을 해보면 독자는 흠을 찾아내느라 바쁘고 작가는 <이 악물고> 방어하느라 바쁘다. 우연이라도 같은 설정이 나오면 고성을 지르며 싸우는 경우도 보았다. 내가 ‘꽃마담’ 이라는 캐릭터를 썼더니 다음 주에 ‘물마담’을 등장시킨 분도 있었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물과 꽃은 다른데.     


늘 내가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완벽하기를 바란다. 그 과정이 고되고 힘들어서 슬쩍 외면하기도 한다.      

다시 한 번 이글을 읽어주시는 독자분들께는 조금 죄송하지만, 숨쉬듯 조금은 가볍게 쓰는 글이 브런치에 남기는 글이다. 나도 숨은 쉬어야지.

그렇지만 단 한 순간도 잊지 않는 것이 있다면, 내 글이 곧 나의 얼굴이고, 내 글에서 못남이 느껴지면 내가 못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내 글을 아낀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이들이 정성과 마음을 다해 내 글을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생각이 다르다고, 혹은 나의 글을 오해했다고 해서 ‘세상 소중한 내새끼’를 방어하듯 자의식 과잉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남의 글을 ‘우라까이’ 해서 세상에 내놓은 이도 작가이고, 한 작품에 수십년을 쏟아부은 이도 작가이다. 어느 것이 옳다고는 못하겠다. 변화하는 세상에 맞춰 영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재능이니 나와 다르다고 해서 비난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작가’입네 하며 과하게 꼿꼿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겠다.          

 

세상에 글 쓰는 일만 고되고 힘들겠는가?

우리가 사는 세상, 살아가는 모양은 모두가 다르고, 모든 삶은 적당히 고되고 적당히 행복하다. 그러니까 사는 것 아닌가.

빵을 구워도, 아이들을 가르쳐도, 전기를 고쳐도, 환자를 치료해도, 모든 삶은 고되고 정성스럽고 아프고 즐겁다.      

그리고 매 순간, 모든 일들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럼에도 또 내뜻대로 읽히지 않는 것이 삶의 얼굴이기도 했다. (겪어보니 그렇더라.)          



나는 내가 좋아서 이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늘 경계하는 마음이다.

자의식 과잉은 쪽팔림 하이패스임을.


나는 여기 앉아서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을 할 뿐이다. 남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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