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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Oct 15. 2024

아주 무서운 이야기.

요즘 목과 어깨 상태가 좋지 않아서 꾸준히 치료를 받는 중이다. 

처음에 찾아갔던 병원에서는 의사가 질겁을 하며 ‘70대 할머니 목상태’라고 하였다. 

당장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이대로 두면 수술도 못하고, 목도 못 가눌 것이라며 언성을 높였고 일단 통증 치료를 하고 꾸준히 ‘도수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무조건.     


도수치료는 비싸다. 게다가 나는 실비보험도 없다.

그래도 목을 못 가누고 살 수는 없으니 치료를 받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마음이 바뀌었다. 치료실에 엎드려 주사를 맞는데 (엑스레이인지 CT인지 실시간으로 보면서 주사를 놓는 그런 것) 의사가 보조하던 직원과 잡담을 시작했다. 애가 학원에서 맞고 왔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는 것이 대화의 핵심 주제였다. 나는 그 집 애가 학원에서 맞고 온 것을 알아야 할 이유도 없고 지금 내 목에 주삿바늘을 꽂으면서 자기 애가 학원에서 맞고 온 문제를 논하고 있는 의사에게 내 치료를 맡길 수는 없었다.      


다른 병원을 찾았다. 이 병원 의사는 나이가 조금 있어 보인다.

심하지는 않은데, 꾸준한 치료가 필요할 것 같다고 했다. 도수치료는 권하지도 않았다. 말 대로 나름 꾸준히 다니는 중이다.     

 

“좀 어떠세요? 나아지셨어요?”

“음...... 어깨 위에 곰이 한 마리가 있었는데요. 지금은 반 마리 정도요.”     


의사가 저항 없이 웃음이 터졌다. 이런 설명은 처음이란다. 

그리고 다시 한번 당부하듯 말했다.      


“오래 걸려요. 성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네.”     


......

‘알죠. 오래된 일 인걸요.’  


보탤 수 있는 말이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나만 알면 되는 이야기이니까.  

     


         

나도 순진한 때가 있었다. 

따질 줄 모르고, 잘 속고, 어리바리, 우왕좌왕. 뭐 그런 것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던 그런 때가 있었다. 

대학 3학년 때, 학교 정문 앞에 자취방을 구했다. 가격 대비 조건이 좋아서 덜컥 계약을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터졌다. 전기가 나가버린 것이다.  

    

상황은 이러했다. 

애초 건물주는 부도를 내고 도망갔고, 그 집의 전세세입자들은 보증금도 돌려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전기요금 납부까지 밀려 건물 전체가 단전이 된 것이다. 곧 수도도 끊길 것이라고 다른 세입자가 알려주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 집주인이 아닌 그 집의 원룸 하나를 전세로 계약한 사람과 월세 계약을 한 것이다. 딴에는 똑 부러지게 대응한다고 따지고 들었지만, 세상사 노련한 ‘어른’에게 스무 살 하룻강아지가 당할 재간이 없었다. 자기 집에 다른 방이 있으니 그쪽으로 이사를 하라는 해결책을 내놓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다시 이사를 해야 했다.      


이사 한 집은 조금 낡았지만 그럭저럭 살만했다. 재수가 없었지만, 액땜했다 생각하고 그 집에서 살았다.      

바쁜 틈에서 지루한 일상이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시험 기간이었고 그날은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다. 무언가 강력한 힘으로 후려치는 듯한 느낌과 함께 목이 움직이질 않았다. 어깨와 목 근육이 돌처럼 뭉쳤고, 조금도 움직일 수 없어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증상은 점점 심해져서 나중에는 팔을 올릴 수가 없어서 세수도 못하고, 심지어 숟가락질도 하지 못했다. 근처 신경외과, 정형외과, 한의원 등등 안 가본 곳이 없었는데 특별한 문제를 찾을 수 없다고 하였고 그저 그렇게 시간만 흘러가는 중이었다.     

거의 누워서 지내야 했고, 밥도 먹을 수가 없었다. 친구들이 김밥을 사다가 누워있는 내 입에 한 알씩 떼서 넣어주고 컵에 빨대를 꽂아 물을 먹여주고 떠났다. 선물이라며 약국에서 제일 비싼 파스를 한 뭉치 던져주고 가기도 했다. 고마운 아이들이다.      


지독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아픈 것도 아픈 건데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즈음부터 심한 가위에 눌렸다. 종종 가위에 눌린 적은 있었으나 그렇게 심한 경우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게다가 어찌나 생생한지 그 느낌이 소름 돋도록 오래 남았다. 머리채를 잡고 흔든다거나, 이쪽에서 저쪽으로 밀어버린다거나 나를 번쩍 들어 집어던진다거나.....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도 들렸다.      


‘어머, 얘 안 자나 봐? 너 안 자?’     


아직 학기는 끝나지 않았고, 억지로 학교를 다니고 있다가 주말마다 집에 가서 본가에서도 병원이며 한의원이며 두루 다니면서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차도는 없었다. 

지금과는 달리 태생이 마른 몸이었던 내가 그 난리 통에 마르다 못해 앙상해지자 엄마의 울화가 엉뚱한 쪽으로 튀었다. 같은 도시에 살고 있는 사촌언니에게 전화를 해서 버럭 성질을 낸 것이다. 언니는 무슨 죄인가.      

이모(우리 엄마)에게 난데없이 불벼락을 맞은 사촌 언니가 내가 살던 집으로 찾아왔고, 내 꼴을 보고는 자신의 엄마, 즉 나의 이모에게 상황 보고를 하였다. 당시 우리 엄마와 이모가 잠시 냉전기였으니 같은 동네에 살고 있음에도 이모와 나는 왕래가 없었다. (우리 이모는 내가 다니던 학교 앞에 살았다.) 결국 이모까지 출동을 하고, 혼자 두면 안 된다는 명목으로 나를 그 집에서 끌어내었다. 나는 잠시 이모집에 머물렀고 목상태는 여전했으나 가위눌림은 끝났다. 그리고 얼마 후 이모가 말했다.     


“그 방에서 사람이 죽었어.”

“....... 말을 하지 말지.”     


나는 무서워서 울었고, 이모는 핏,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면서 담배를 물었다.     


그 방에 살았던 나와 같은 학교의 4학년 여학생이 스스로 생을 놓았다고 했다. 그 아이의 엄마가 달려와 통곡을 하고, 몸부림을 치는데 주인아줌마가 끌고 들어가며 입을 막았다고 한다. 집주인은 내가 다니던 학교의 교수였다. 그 부인이 워낙 우악스럽기도 하고 나름 ‘교수님 댁’ 이니 동네 사람들은 굳이 그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소문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연기처럼 퍼져나가서 알 사람은 다 알고 난 후에 흩어진 모양이다.      




이후 목 상태도 서서히 좋아졌고 나는 나름 멀쩡하게 학교를 졸업하여 그 동네를 떠났다.

그러나 그때 이후 목 통증은 고질병이 되었다. 잠잠하다가도 불시에 찾아들기를 반복하며 20년이 넘도록 존재를 과시하고 있다.      

아마도 어떤 이유로 급성통증이 생겼고, 젊은 나이 덕에 자연치유가 되었으나 불안정한 자세와 생활 습관 때문에 고질병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니 나는 귀신의 농간이라거나 초자연적인 현상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젊지도 않아서 자연치유가 힘드니 꾸준히 치료를 받아야 겠다고 생각한다.  

참, 엊그제는 난데없이 가만히 서 있다가 허리를 삐끗하였다. 역시 젊지 않다.           


귓가에 맴돌던 목소리와 내 머리채를 잡던 그 소름 돋는 느낌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때는 무서웠고, 이후에는 생각할 때마다 무언가 찜찜했고, 갑자기 슬펐다. 내 머리채를 잡던 손이, 내 귓가에 속삭였던 목소리가 그의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돌이켜보면 하나의 목소리도 아니었고, 무언가 뒤섞인 불분명한 소리였으니 그 소리의 주인을 특정할 수는 없다.     


그래도 나는 그에게 묻고 싶을 때가 있다.


“너도 살아있는 게 힘들었니?”     




나보다 언니였을, 그러나 이제는 나보다 한참 어린 채로 멈춘 그에게 묻고 싶었다.

너도 그랬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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