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직원 S, 37세
“이젠 이런 말 늦었지만, 다신 그럴 리 없겠지만, (All right) 그냥 난 조금만 기억할게. 넌 내 마음속 깊은 곳에 그냥 그렇게 있어 줄래? (All right) 그래, 난 조금만 간직할게.” *
얼마 전 라디오에서 우연히 나온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음악을 듣고 우리가 즐겨 듣던 이 노래를 찾아 들었어. 무려 17년이나 된 노래라니. 믿기지 않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소규모 동창회랍시고 웃고 떠들고 술 마시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다들 가정도 있고 바빠서 얼굴 보기도 힘드네.
이 노래를 들으며 나의 2003년을 떠올려. 이미 대학생이었던 형이랑 동자가 자주 찾아와주던 중앙 도서관 앞에서 떨던 수다와 간식들, 그리고 습관처럼 들렀던 서현역의 아이스베리가 어쩌면 나의 재수 생활을 지탱하게 했을지도 몰라. 많이 늦었지만 고마워. 우리가 분당 곳곳을 누릴 수 있게 도와주던 형의 황슈에*는 어떻게 됐어? 결혼하면서 폐차시켰으려나?
여동생이 없던 형이 유난히 날 귀여워해 줘서 가끔 오해한 적도 있었지만, 이성 감정 이상의 우정을 나눴다고 생각해. 형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면, 자주 함께 만나던 예쁘게 생긴 동자에게 마음이 있었던 거야?
어쩌다 우리 학교 학생회장 출신인 형이랑 가까워졌는지는 자세히 기억이 나질 않지만, 많은 취향이 공유되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스스로 결론 내렸어. (그리고 그때 왜 내가 동갑내기 동창에게 형이라 불렀는지 노답이고 극혐이지만, 내가 빠른 생일이어서라고 위안하는 중이야^^) 피아노를 좋아하던 소년, 그리고 그림을 좋아하던 소녀가 만났으니 유희열을 좋아하는 건 당연했겠지. ㅋㅋ 그리고 아기를 귀여워하고 예술적 감수성이 충만했던, 나와 많이 비슷했다고 느꼈던 형이 취미로만 피아노를 쳐서 정말 다행이야. (직업 예술가, 먹고 살기 힘들다 ㅠㅠ) 어쨌든, 예고 없이 내 고막을 파고 든 브아솔(브라운 아이드 소울) 음악 덕분에, 황슈에를 타고 우리가 좋아하는 노래들을 들으며 드라이브했던, 2003년과 2004년의 많은 날이 눈앞에 선명하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듣는 중, 그리고 오늘 종일 들을 각이야.)
브아솔의 노래는 그 무렵 나의 싸이월드 홈 BGM뿐 아니라 휴대폰의 컬러링과 벨소리를 담당하고 있었지. 아마 형도 그랬을 것 같은데.. 맞아? 얼마나 자주 들었으면, 전주만 들어도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어. 아니 정확히는 2003년 형과의 추억이 선명하게 기억나. 지금도 가까이 살고 있지만 이미 결혼한 형에게 먼저 연락하는 것이 함께 사는 분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아서 하지 못하겠어. 과거의 나라면 “오늘 브아솔 노래 듣다 생각나서 연락했어. 잘 지내지?”라고 했을 텐데 말이야. SNS를 잘 하지 않는 형이지만, 눈팅은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가끔은 억울해. 내 소식은 보고 있으면서, 형의 소식은 알려주지 않으니까.
조금은 슬프지만 명백한 사실은, 우리가 2003년의 그떄처럼, 만나서 많은 시간을 공유할 일은 앞으로 없을 거야. 그래도 “바보” 가사의 후렴구처럼,
“그냥 난 조금만 기억할게. 넌 내 마음속 깊은 곳에 그냥 그렇게 있어 줄래? 그래, 난 조금만 간직할게.”
형의 결혼식엔 참석했었지만, (언제일지 모르는) 나의 결혼식에 형을 초대할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수록, 경조사에 누구에게 연락을 해야 되는지 점점 어려워져.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더라도, 이때의 추억과 기억으로 나의 결혼식엔 반갑게 와 줄 거지? 그 시절 형이 귀여워해 준 여동생을 축하해주는 마음으로 말이야. 이 연락이 조만간이었으면 좋겠다. 각박한 현실에서도, 형의 그 예술적 감수성, 오래도록 간직하며, 즐겁게 지내.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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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발매된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Soul Free』 앨범 중,“바보”의 가사
* 병알이 형의 황색 SM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