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위 말하는 이부망천의 당사자이다.
이 단어가 주는 모멸감은 이따금 나를 슬프게 할 때도 있지만, 내가 겪은 경험이 오히려 그 단어를 만들어낸 것과 다름없으니 300만 인천시민에게 참 미안할 따름이다.
1997년 6월 6일 현충일, 초등학교 2학년이던 나는 동네친구 자일이의 인사를 받으며 서울 자양동을 떠나 인천 부평으로 자리 잡았다.
부평이라하면, 분위기가 좋지 않고 무서운 동네로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30년 전의 부평은 인천의 핵심 도심이었고, 더욱 놀랍게도 내가 살고 있는 부평의 지역은 그 중에서도 학군이 매우 발달한 지역이었다.
지금이라면 꽤 흔한 초품아겠지만, 90년대 초에 총 5,000세대의 아파트 단지와 그 내부에 위치한 초등학교는 지금 돌이켜봐도 어느 학군지에 뒤지지 않는 면학분위기를 가지고있었다.
그리고 그 초등학교와 약 15분거리의 주택에서 살고 있던 나는 그곳으로 전학가게되었다. 한 반에 50명이 가까이 지내던 그 곳에서 나와 같은 非아파트인은 서너명 남짓이었다.
어린 9살짜리가 나의 집이 다른 친구들과 약간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돌아가며 서로의 친구 집에서 노는 일상을 즐길 때에는 그 녀석은 몰랐지만, 친구 한 명 한 명의 집을 모두 돌고나면 이제 우리 집의 차례가 오게된다는 사실을, 친구 열 명을 데리고 집 코앞까지 도착한 그 순간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방 3개짜리 아파트가 아닌, 상가 주택의 거실없는 방 2개짜리 건물을 도저히 보여줄 수 없던 그 녀석은 아직 제대로 났는지도 모를 잔머리를 굴릴 수 밖에 없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리고 답이 안 나오는 순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회피뿐이었다.
“아, 내가 열쇠를 안 갖고 왔는데 잠깐만 요 앞에 가서 기다려봐”
라고 약간의 시간을 번 뒤, 친구들이 안 보이는 사이 재빠르게 집으로 들어왔고, 소위 말하는 잠수를 탔다. 내가 돌아오지않자 내 집 문을 두드리는 친구의 목소리를 모른척하고, 작은 방으로 숨어 그들이 집에 빨리 가기만을 바랬다. 다음 날, 친구들을 다시 만난 내가 어떤 핑계를 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앞으로는 다시는 누군가를 초대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은 들었던 것 같다.
이러한 삶을 유일하게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나의 친형이었다.
나의 형은 정말 나와 닮은 점이 하나도 없던 사람이었다. 운동을 꽤나 잘해서 축구교실에 다니면서 빠따를 맞아본 어린이였고, 화이트데이나 빼빼로데이 때 여학생에게 편지도 받는 외모가 준수한 어린이였고, 수학여행 시간에는 유승준의 찾길 바래를 추기도 하는, 인싸라는 단어가 창조되기 전에 이미 인싸였던 어린이였다.
그런 형과 함께 등교길을 하면서, 남들과는 다른 꽤나 먼 등교거리는 하나의 게임이 되곤했다. 횡단보도를 건널 필요가 없던 다른 친구들과는 다르게 우리는 몇 번의 신호등을 마주쳐야했지만, 그 몇 개의 파란불과 몇 개의 갈림길은 우리에게 그때그때 빨리 달려가서 터치하는 귀여운 게임이 되었고, 형과 함께 나는 매일매일 꽤나 즐거운 등교길을 걸었다.
어쩌면 컴플레스, 자격지심, 소심함으로 얼룩지었을지도 모른 나의 초등학교 생활은 너무 아름다운 기억만 남았다. 그러한 가정환경에 대해서도 아무런 거리낌없었던 그 시절의 동창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남긴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몇 해 전, 그 아파트에 부모님이 터를 잡으셨고, 베란다에서는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가 보인다. 30년 전 그렇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아파트는, 낡아버린 구축 아파트가 되어있었고, 두 아들을 꽤나 잘 키워내 두 아들 모두 대기업 직원으로 취업해냈지만 우리의 삶은 극적으로 변하진 않았다.
주차난 때문에 이중주차되어있는 차를 밀어야하고, 자리가 없으면 한 바퀴를 돌아 길가에 차를 대고 걸어야 하는 삶을 살고 있고, 20년 전의 꼬마는 여전히 높게 뻗은 두 손보다 조금 위를 닿고싶어하는 그대로의 삶을 살고 있지만..
그러한 것들 역시 형과 함께 터치하던 신호등과 같길 바라며 또 새로운 달리기를 매일 해 나가야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