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흡발성발음을 연습하면서 또 하나의 큰 변화가 찾아왔다. 취향이 바뀐 것이다. 그동안 난 밴드 음악, 다시 말해 기타, 드럼, 베이스가 있는 음악을 좋아했다. 음악은 역시 악기들이 가득 채워줘야 제맛이다. 기타의 화려한 속주 연주, 드럼과 베이스가 만들어내는 리듬의 조화. 얼마나 멋진가. 그러한 음악을 들으면 가슴이 뛴다. 그리고 실제 그런 음악을 지금도 연주하고 있다. 락만큼은 아니지만 간혹 재즈와 클래식도 듣는다. 클래식과 재즈 역시 화려한 악기 연주에 집중해서 듣는 편이다.
물론 이전에도 매력적인 보컬리스트들도 좋아했다. 르네상스의 애니 하슬렘, 레드제플린의 로버트 플랜트, 캐나다의 포크싱어 조니 미첼, 소울의 여왕 아레사 플랜클린,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 블루스이자 록 보컬리스트 조니스 조플린, 여성 재즈 보컬리스트들 중 가장 완벽한 기교의 소유자이며 스캣을 창시한 엘라 피츠제럴드(엘라 피츠제럴드는 독일의 유명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도 팬이었을 정도로 뛰어난 가창을 들려준다).
하지만 보컬은 나에게 있어 악기의 한 부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 밴드 음악에서 팬들은 거의 보컬에 집중한다. 사실 밴드 음악은 악기가 먼저다. 하지만 팬들은 어려운 악기보다는 퍼포먼스를 곁들인 보컬리스트를 더 좋아한다. 그런 시샘, 또는 질투 때문에 나는 더욱더 악기에 집중했는지도 모른다. 두 번째 이유는 그동안 보컬의 매력을 몰랐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내가 드럼을 연주하면서부터 드럼과 베이스가 만들어내는 리듬 플레이를 이해했듯이 목소리를 연습하고 나서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매력을 조금은 알게 됐다. 다시 말해 그전엔 제대로 된 목소리의 매력을 몰라 보컬리스트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참 일하다 말고 회현동엘 갑자기 찾았다. 1년 전에 성악 LP를 몇 장 구입하고선 매달 찾아와야지 했는데 1년이나 지난 것이다. 그리고 한 군데 샵엘 들어갔다. 주인장은 처음에 신기해서 그냥 구경이나 하고 가는 사람쯤으로 보고 시큰둥하게 대했다. 이내 몇 장의 LP를 구입하려는 의지를 보이자 너무나 신나 했다. 그러면서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길게 늘어놨다. 가게를 하게 된 배경, 성악에 관심을 가지면서 성악가한테 성악을 배우게 된 배경부터 길게 늘어놓더니 본인이 좋아하는 음반을 연신 꺼내 턴테이블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우리도 맞장구를 쳤다. 어떻게 이렇게 좋냐면서, 그랬더니 주인장은 더 흥분했다. 15만 원짜리 초판을 10만 원으로 선뜻 깎아주면서 3만 원짜리를 한 장 더 얹어주고, 10만 원짜리 초판을 8만 원에 깎아주고 2만 원짜리 LP를 덤으로 선뜻 줬다. 결과적으로 5장에 30만 원 하는 것을 20만 원에 구입하게 됐다. 비싸게 샀는지 모르겠지만 그날의 경험까지 더하면 그 정도 가격은 지불할만했다.
여전히 난 클래식, 특히 성악은 전혀 문외한이다. 하지만 디미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프리츠 분덜리히, 에디트 마티스, 엘리 아멜링을 들으면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냥 그 목소리가 들려주는 음악에 위안을 받고 하루의 피곤을 잊는다. 호흡발성발음 수업이 클래식과 성악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나의 음악 생활을 다시 하게 한 것만 해도 만족스럽다.
그동안 나의 버킷 리스트 중 하나가 유럽 여행, 특히 영국 여행이었다. 브리티쉬 락이 좋아서다. 캐빈 클럽에도 가고 라디오헤드나 오아시스 공연도 현지에서 보고 싶어서다. 쿠바와 자메이카에 가고 싶은 것도 음악 때문이다. 이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빈, 잘츠부르크, 라이프니치, 프라하, 파리, 베를린, 밀라노에 가고 싶어졌다. 음악 페스티벌에도 참여하고 박물관도 가고 음악가의 생가도 방문하고 싶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그 도시 뒷골목 어딘가에 있을 중고음반가게에서 클래식 LP 중고음반을 가득 사가지고 오고 싶다(회현동 중고 LP가게 주인장 말로는 이제 유럽도 중고 LP를 찾기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한 박스 넘게 사면 택배로 붙이면 그만이다. 물론 공연도 보고 박물관과 위대한 음악가의 생가도 가고 길거리에서 어느 무명 클래식 음악가의 연주회도 구경하고 중고 LP도 사려면 상당히 자료 조사를 해야 할 테지만..
사실 호흡발성발음 연습 때문만은 아니다. 클래식에 관심을 가진 이유 중 하나는 최근에 술을 끊은 것과 관련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록음악에서 빠질 수 없는 게 맥주다. 우드스탁을 자주 찾을 때가 있었다. 2000CC 맥주와 바로 앞사람의 목소리조차 듣기 힘든 록음악으로 꽉 찬 공간에서 록음악을 들을 때란 행복 그 자체다. 재즈도 마찬가지다. 재즈음악을 듣는데 맥주 한잔, 와인 한잔 없이는 재즈를 감상하기 힘들다. 하지만 클래식은 다르다. 클래식음악 감상실에선 주로 차를 제공한다. 술 없이 듣기 힘든 락이나 재즈보단 차로 들을 수 있는 클래식이 지금 나에겐 맞다.
오늘도 턴테이블에 나도 잘 모르겠는 성악가의 LP를 올려놓고 성악가가 어떻게 소리 내는지를 들어볼 생각이다. 아직은 그저 목소리가 주는 위안에 빠지는 수준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