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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앞뒤

by 조작가

글은 서론-본론-결론(3단)이나 기-승-전-결(4단)로 구성된다(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라는 5단으로도 나눌 수 있다). 국어 수업 때 지겹도록 들은 내용이다. 어느 한 대목을 잘라 어느 구성에 해당하는지, 그리고 몇 편의 글을 모아 놓고 글의 구성이 다른 글이 뭔지를 찾아내는 시험을 숱하게 치렀다. 괴롭고 힘든 이 일을 이해하기 시작한 건 불행하게도 학교를 졸업한 뒤다. 대학원에서 논문을 쓰고, 직장에서 보고서를 쓰면서 글의 구성을 이해하게 됐고 그러면서 세상의 모든 일과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글처럼 서론-본론-결론 또는 기-승-전-결의 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논문은 서론, 본론, 결론의 구성을 가진다. 서론에서는 논문을 쓰게 된 목적과 배경이 나온다. 본론에서는 연구 방법과 이론적 배경, 연구틀을 소개하고, 자신의 가설이 맞는지를 자료분석을 통해 증명한다. 결론에서는 자신의 주장을 요약하고, 연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을 마지막으로 밝힌다. 보고서는 어떤 현상에 대한 기술과 이에 대한 진단, 해법으로 구성된다. 기획서나 제안서도 마찬가지다. 서론 부분에서 사업을 기획(제안) 하게 된 이유와 배경을 밝히고, 본론 부분에서는 사업 수행 방법(자원 배치, 관리 운영 등)을 기술한다. 마지막에는 이러한 사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밝힌다.


커뮤니케이션 역시 일정한 구성에 따라 이루어진다. 대화는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고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의 구성에 내용을 얹어야 의미를 잘 전달하고 이해할 수 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하는 것은 시간을 절약하는 것처럼 보이나 결국엔 배경 설명부터 다시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앞부분에 쓸데없다고 생각했던 긴 사설도 중요하다. 분위기를 잡기 위해서 필요한 말이다.


나는 회의도 기승전결의 구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회의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회의의 목적부터 공유하고, 회의의 어젠다를 정한다. 그리고 회의를 개최하고, 마지막에 회의 결과를 확인하고 공유하면서 마무리를 짓는다. 규모가 큰 회의라면 회의의 목적과 어젠다를 정하는 데에 많은 노력이 들어가며, 회의 이후도 중요하다. 국가간 회의는 사실 회의 전이 훨씬 길다. 몇 개월부터 몇 년씩 걸린다. 그리고 회의는 겨우 하루도 걸리지 않는다.


일상생활도 기승전결의 구성요소를 가지고 있다. 영화 감상에는 '영화 보기 전', '영화 보기', '영화 본 이후'로 구성된다. 영화 보기 전에는 영화에 대한 이해와 정보를 파악하고 공유하며, 영화를 보고 나서는 영화에 대한 감상을 나누거나 리뷰를 공유한다. 데이트할 때 영화만 달랑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영화보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행도 '여행 전'과 '여행', '여행 후'로 구성된다. 여행 전에는 여행의 목적과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여행을 즐기고, 여행 후에는 여행에 대한 감상을 나눈다. 여행을 다니는 것보다 여행 전이 더 셀레고 여행 다녀와서 사진을 보면서 재밌어하는 경우가 많다. 남녀 간의 사랑에도 앞뒤가 있다. 분위기를 만들고, 사랑을 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본론부터 들어가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



회의나 영화 감상, 여행, 사랑 모두 준비하고 계획하고 분위기를 만들고 감정을 느끼고 공감하는 것 모두 그 일의 한 요소이다. 어떨 때는 일보다도 그 일의 앞뒤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일이 잘 되려면 앞뒤를 잘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기승전결 없는 것을 싫어한다. 앞과 뒤는 생략해도 좋을만한 게 아니라 반드시 꼭 해야 하는 것이다.

요즘 일의 앞뒤를 바꾸는 일이 많다. 영화의 '5분의 법칙', 드라마의 '첫 회의 법칙'이라는 게 있는데, 이는 첫 장면이나 첫 회에 눈길을 확 끌게 해서 시청자가 계속 보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이야기엔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다고 말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영화에 적용한 시드 필드는 <시나리오란 무엇인가>에서 영화는 3막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했다. 1막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계기가 있고, 2막에서 중심 사건이 일어나며, 3막에서 클라이맥스로 문제가 해결이 되는 구조를 갖는다고 했다. 이러한 구조가 가장 완벽한 구조이고 시간 배분을 잘해야 재미있는 이야기가 된다. 요즘의 드라마는 이러한 순서를 무시하고 처음부터 중간이나 끝을 배치하거나 조금 느슨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없애버리기도 한다.


음악은 Intro, Verse, Chorus, Outro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구성을 서로 알아야 연주를 할 수 있다. 최근에 이러한 구성 순서를 바꾼 장르가 인기를 끌고 있다. 앞부분에 소위 말해 훅(hook)이라고 하는 주제음을 배치하는 경우가 많다. 아예 후크송이라는 장르가 만들어질 정도다. 음악이 이렇게 달라진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스트리밍 서비스를 즐기는 소비자가 앞부분이 별로면 바로 다른 곡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귀를 사로잡아야 1분 이상(스트리밍 서비스는 1분 이상 들어야 저작권료를 배분한다) 붙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직 이런 음악이 어색하기만 하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너무나 바쁜 나머지 앞뒤를 빼고 핵심적인 것만 즐기려고 한다. 핵심도 중요하지만 그 핵심으로 가는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잘 안다. 그 과정을 천천히 즐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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