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자리 양보 방법

by 조작가

어느 날 퇴근 때 일이다. 오후 들어 몸이 슬슬 안 좋기 시작한게 퇴근쯤 되니 확실히 감기구나 싶었다. 마을버스를 타고 ㄷㅅ역에 내려 감기약을 지어먹었다. 약사에게 '아주 살짝 감기든거 같은데 감기약 하나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약사가 웃으면서 '아주 살짝이요?'라며 아주 살짝 걸린 감기약인지 아닌지 모를 감기약을 건네줬다.


뭘 할까 생각하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ㄷㅅ역에서 타면 앉아서 편히 갈 수 있는 버스다.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 음악을 들을까말까하다 컨디션이 나쁨을 감안해 귀를 괴롭히지 않기로 했다. '겨울엔 왜 버스 안에 사람이 많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내 앞에 나이가 들어 보이는 아줌마가 섰다. 대충 봐선 자리를 양보할 정도로 나이가 많지는 않아 보였다. 이렇게 헷갈릴 때는 양보하지 않는 게 나의 법칙이다. 왜냐면 젊게 봐줬으니 고마운 건 상대방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더구나 난 오늘 피곤한 데다가 약도 먹지 않았는가라는 핑곗거리도 있다.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줌마같은 할머니인지 할머니같은 아줌마인지 그분이 내 앞에서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끙끙 거리며 힘들어 보였다. 이런. 그 순간 내 자리를 확인해보니, 노약자와 임산부 양보석이 아닌가. 양보해야겠다는 생각을 들었다. 그리고 그분을 자세히 보니 할머니같은 아줌마보다는 아줌마같은 할머니에 가까웠다. 하지만 양보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한참을 고민했다. '그냥 음악이나 들으면서 무시해버릴까?', '사람들이 따지면, 난 할머니가 아니라 아줌마로 봤어요라고 말하면 되잖아', '그래도 아무리 내가 힘들어도, 나보다 나이가 많고 게다가 힘들어하는데 무시할 순 없잖아'.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을 하다 결국 자리에 일어났다. '여기 앉으세요'라고 한 게 아니라, 그냥 자리에 일어났다. 양보 타이밍을 놓칠 때는 내리는 양 그냥 일어나는 게 좋은 방법이다. 양보 타이밍을 놓침으로써 생기는 어색함과 불편함보다는 이게 낫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조금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