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를 실행하면 영화 순위에서 1~2위를 다투는 SF 영화 《정이》.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투입된 전투 용병의 활약상이 기대를 모은다. AI 기술을 개발하는 윤서현 팀장(고 강수연 분)은 전쟁 영웅이었던 어머니의 뇌를 복제해서, 로봇에 뛰어난 전투기술을 주입했다.
설정 자체는 신선했다. 딸이 식물인간이 된 어머니의 뇌를 살려서, 어머니가 이루지 못한 ‘내전 종식’을 전투 로봇을 통해서 이루려고 한다는 것. 그 어떤 영화에서도 보지 못한 스토리였다.
영화 《부산행》과 《반도》, 드라마 《지옥》 등 세상의 종말과 같은 염세주의적인 감독의 세계관, 하지만 그 안에서도 ‘사랑’과 같은 일말의 희망도 보여준다. 이 영화를 보면서 자꾸 《부산행》에서 아빠 서석우(공유 분)와 딸 서수안(김수안 분)의 애틋한 부녀간의 사랑은, ‘좀비’보다 더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이》에서 영화 제목의 모티브가 된 연합군 측의 최정예 리더인 '윤정이'도 사실 그의 딸 윤서현의 수술비 마련을 위해서 전투에 참가했던 것이다. 그녀는 사람들에 전투 ‘아이돌’이라고 불렸지만(심지어 그녀를 모방한 인형도 팔았다), 실상은 가난한 삶에 허덕이면서 딸의 건강을 바라는 평범한 엄마였을 뿐이다.
지구는 황폐해지고 결국 살 수 없는 곳이 되자, 지구 위에 쉘터라는 곳이 생겨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되는 사람들은 이곳으로 이주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지구에 남겨져서 비참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지구의 배경이 나올 때마다 이러한 삶이 조금씩 드러났다. 물에 반쯤 잠겨있는 건물들, 그리고 건물 옥상에서 무료 급식을 받으려는 가난한 사람들. 그런데 이 공중에 있는 쉘터 중에서 몇 곳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수십 년간 내전이 벌어졌다.
영화의 첫 장면에는 ‘정이’가 깨어나면서 전투를 시작한다. 왠지 《터미네이터》의 첫 장면이 연상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실제 전투가 아니고, 전투 로봇의 능력치를 올리기 위한 메타버스에서 벌어진 실험이었다. 처음부터 나름대로 반전이 있었다. 그리고 평소 머릿속에 있던 배우 김현주가 액션 역할을 했다는 것이 굉장히 낯설면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시고니 위버, 밀라 요보비치, 지나 데이비스처럼 여전사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너무나 선한 인상의 배우다. 몸도 조금 무거워 보였다. 아마 대역을 썼다면 안 그랬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마흔 중반에 액션신을 소화한 그녀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고 강수연 씨의 연기를 볼 수 있는 마지막 작품이라는 점에서 왠지 가슴이 찡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대여배우가 이렇게 SF 영화에서 활약하는 모습도 새롭게 느껴졌다. 그만큼 장르를 불문하지 않은 그녀의 노력도 대단하다. 다만, 자꾸 건강 문제로 세상을 떠난 것이 의식이 되었는지 연기가 겉도는 느낌이 들고, 발성도 예전보다 못하다는 아쉬움도 있었다. 물론 극의 중반 이후로 가면서 그녀의 연기력이 점점 발휘되면서 더 몰입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이 영화에서 시한부 선정을 받기도 한다. 우연이기는 하지만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오히려 그녀의 아역을 연기한 배우 박소이의 연기 때문에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특히 그녀가 수술을 받기 전에 엄마에게 수술 후 꼭 옆에 있어달라고 말하는 장면, 그리고 엄마가 치명적인 부상으로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받은 어머니의 캐릭터 인형을 바라보는 모습 등.
영화에 대해서 호평과 혹평이 엇가리는 가운데, 그래도 김현주 배우의 액션 영화, 고 강수연 배우의 유작, 연상호 감독의 SF 영화라는 점에서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특히 자신이 사랑하는 엄마를 살상무기(물론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한 무기)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딸이라는 설정이 참 잔인하면서도 새로운 소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구소장 역할을 맡은 배우 류경수 씨의 열연(똘기 넘치는 안드로이드 로봇)도 인상적이다. 《지옥》에서도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지만, 이 영화에서도 자신만의 연기력으로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었다. 특별 출연으로 나온 배우 엄지원 씨도 반가웠다.
다른 조연 배우들의 아쉬운 캐릭터, 좀 더 입체적이면서 구체적인 스토리 라인 등이 있었다면 더 많은 시청자들이 공감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연상호 감독의 세계관 중에 하나라고 하면 뭔가 이어지는 것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