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자왈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는 것이 없으면 사물의 이치에 어두울 수 있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 위정爲政 2.15
《논어》는 스승과 제자의 끊임없는 문답(問答)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스승과 제자 간의 질문을 통해서 점차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공자의 교육 방식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질책을 받았으나, 나중에 학문을 더 열심히 닦아서 스승으로부터 인정받았습니다. 때로는 스승도 제자로부터 깨달음을 얻기도 했습니다.
열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지만, 공자의 마음을 유난히 아프게 만든 제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제자 염유(冉有)입니다. 그는 공문십철 중에서 자로와 함께 ‘정사(政事)’ 능력을 인정받았고, 천호의 큰 읍에서 현령을 맡을 정도라고 스승에게 평가받았습니다. 전쟁터에서도 뛰어난 장수였습니다.
공자가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낯선 나라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입니다. 당시 염유는 노나라의 세도가 계강자 밑에서 일했습니다. 이때 제나라와 전쟁이 벌어졌고, 그는 전장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는 권력자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자의 능력을 계강자에게 칭찬해서 그를 다시 고향으로 불러들이도록 했습니다.
공자에게는 은인과 다름없지만, 그는 유난히 공자에게 혼이 많이 났습니다.《논어》를 읽다 보면 염유에 대한 칭찬은 거의 없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늘 부족하게 보이고, 공자의 눈높이에 맞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염유는 실력 있는 행정가로서 후대 사람들이 존경했던 네 명의 자(子) 돌림인 유자, 증자, 민자와 함께 염자로 불렸습니다.
그렇다면 염유는 왜 그렇게 인정받지 못했을까요? 아무래도 그는 실용적인 업무에서는 뛰어났지만, ‘도道’의 의미를 깊이 새기면서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임금과 백성을 사랑하는 ‘인仁’의 정신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스승이 가고자 하는 길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죽하면 염유는 공자에게 “스승님의 도를 즐거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저의 능력이 부족합니다.”(옹야편 6.10)라고 변명할 정도였습니다. 이때 공자는 제자를 포기하기 않고,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중도에 멈춘다. 지금 너는 스스로 한계를 긋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좀 더 강한 의지를 갖고로 제자가 변화하기를 주문했습니다.
시험을 위한 공부의 한계
사실 많은 사람들이 배움에 깊이를 더하기 위한 ‘사색’을 하기보다는 쉽게 공부를 하려고 합니다. 주입식 교육에 익숙합니다. 수업 시간에 새로운 내용을 배울 때도 ‘Why’라는 질문보다는 시험에 나올 문제인지 아닌지가 중요합니다. 초, 중, 고등학교의 교육은 입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대학교에 입학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취직을 위한 공부를 하고 진정으로 궁금증을 갖고 학문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중에서도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교육이 정착된 것은 철저히 실리적인 목적을 위해서였습니다. 1800년대 말에 미국의 산업공학자이면서 경영자인 프레드릭 윈슬로 테일러(Frederick Winslow Taylor)는 과학적 관리법을 창안해서 공장을 개혁하고, 경영 합리화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의 새로운 방식 덕분에 공장의 생산성과 효율성은 증대되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개성은 합리성 앞에서 묵살되었습니다. 그는 인간보다 시스템이 우선한다고 주장했고, 많은 사업가들이 이를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심지어 히틀러(Adolf Hitler)와 레닌(Vladimir Lenin)도 그의 추종자였습니다. 그는 “과거에는 인간이 최우선이었다면 미래에는 시스템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할 정도였습니다.
물론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이러한 합리적인 시스템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더 빨리, 그리고 더 싸게 제품을 생산하는 것이 회사의 큰 경쟁력이었습니다. 학교에서도 이러한 요구에 맞춰서 학생들을 양성했습니다. 실용적인 학문에 인성을 키우기 위한 교육은 ‘전인교육(全人敎育)’으로 불리었습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손다이크(Edward L. Thorndike)는 이러한 교육 시스템 확립에 일조했습니다.
실용적인 지식도 갖추고, 도덕성도 키운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합니다. 자신만의 개성이 강한 사람은 획일화된 가치를 주입받는데 반항심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배우면서 생각하고, 합리적인 의심을 한다는 것
시대는 변했습니다. 세상은 훨씬 더 다양해졌고, 미래는 불투명하면서,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예전의 공식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공자의 명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말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배우면서 생각하고, 합리적인 의심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지식이 나의 것이 되고, 진정한 전문가가 됩니다. 생각만 해서도 안 됩니다. 생각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공부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공자만큼 호기심이 많고, 학문에 열정을 갖고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랬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바라는 기대치도 그만큼 높았던 것입니다. 공자는 제자 염유가 진정으로 ‘호학(好學)’의 경지에 이르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평소에도 호학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칭찬했습니다. 위나라의 경(卿)이었던 공문자(孔文子)에 대해서도 “총명하지만 배우기를 좋아하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공야장편 5.14)고 높게 평가했습니다.
공자 자신도 남들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상대방의 신분과 상관없이, 궁금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그가 제사방식을 꼬치꼬치 묻자, 누군가는 그가 ‘예를 모른다’고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공자는 “이것이 예禮”라고 말했습니다. 즉, 알기 위해서 질문을 하는 것은 결코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역시 공자다운 대답입니다.
다시 공자의 제자 염유를 돌아보시죠. 그가 만약 좀 더 인내심을 갖고 공부의 진정한 목적을 생각했다면, 그의 성취는 다른 제자들 못지않았을 것입니다. 뛰어난 무인이면서, 문인의 자질까지 갖췄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입니다. 아마 자공을 능가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실용적인 학문이나 업적 측면에서는 인정을 받았지만 학문의 깊이에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안연, 자공, 심지어 행동대장이면서 늘 질문이 많은 자로보다도 못한 것으로《논어》에는 묘사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