子曰;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
자왈 지자요수 인자요산 지자동 인자정 지자락 인자수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仁한 자는 산을 좋아하며, 지혜로운 자는 활동적이고 인仁한 자는 고요하며, 지혜로운 자는 즐겁게 살고 인仁한 자는 장수한다.” - 옹야雍也 6.21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라고 성철 스님이 예전에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모든 실체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는 것인데요. 공자께서도《논어》에서 산과 물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지자요수 인자요산’이라는 문구를 모르는 분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왜 하필 물이고 산일까요? 먼저 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동양철학에서 ‘물’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노자가 “최상의 선善은 물이다.”라고 강조한 것처럼 말입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세상의 순리를 따르고, 하나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변화무쌍합니다. 인위적으로 틀을 정하거나 멈추게 하지 않는 한 변화하면서 흘러가는 것이 물입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물처럼 지혜가 흘러야 한다는 것이겠죠. 한 곳에 고이면 안 되고, 다양한 상황에 맞춰서 변해야 합니다. 결국 삶의 지혜를 터득한 사람은 하루하루의 소중함을 깨닫고 활동적이면서 즐겁게 살기 때문에, 비슷한 속성의 물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반면 산은 멈춰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세월이 흘러도 산은 그 자리 그대로입니다. 산은 꾸준히 자리를 지키고, 꽃과 나무, 사람과 동물, 곤충 등 모든 생명체에게 안식처를 주고 포용합니다. 그 중심에는 ‘사랑’과 ‘자비’가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아무런 조건 없이 제공하니까요. 그래서 공자는 인仁한 사람은 조용하면서 고요하고 오랫동안 장수한다고 말한 것이 아닐까요? 즉, 산과 같은 사람은 사랑을 나눠주면서 감정으로 크게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더 오래 산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혜와 지식은 다릅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인가요? 아니면 어진 사람인가요? 둘 다인가요? 사실 ‘지知’가 동적이고, ‘인仁’은 정적이라서 별개의 것처럼 보이지만 둘은 서로 관계가 깊습니다. 인생의 지혜를 터득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 확률이 더 높으니까요.
그렇다면 ‘지’와 ‘인’이 무엇인지 좀 더 알아보시죠. 우선 지혜(智慧)와 지식(智識)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예전에는 지식이 있으면 당연히 지혜로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공부를 많이 했으니 그만큼 삶에 대한 식견도 높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공부를 오래 하고 책을 많이 읽었더라도 자신만의 학문의 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는 강한 집착을 보이고, 다른 생각이나 이념을 좀처럼 용납하지 못합니다.
건전한 비평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지나칠 때가 문제입니다.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지 않고, 상대방을 몰아붙이고 함부로 대하는 것이 과연 지식인(知識人)인가요? 아무리 논어, 맹자, 대학 등을 달달 외우고 깊게 공부했다고 해도, 자신의 행위에 체득되지 않고 지식을 과시하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한다면 과연 그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지식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학창 시절 배운 것들을 생각해 보시죠. 국어, 수학, 과학, 외국어 등 수많은 공부를 했지만 지금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요?
지혜는 ‘현명하게 생각하고 대처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머릿속에 든 것과 상관없이 주어진 상황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게 만듭니다. 꼭 지식을 쌓지는 않더라도 삶의 지혜를 쌓은 ‘현자(賢者)’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처절하게 인생을 살아오신 부모님이 될 수 있고, 주변에 친구, 동료, 선후배, 이웃도 될 수 있습니다.
지식과 지혜는 엄연히 다릅니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가 말한 바와 같이 지혜는 인생의 경험이 함께할 때 나타납니다. 즉, 그는 “과학은 정리된 지식이다. 지혜는 정리된 인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지혜는 도서관에서 책만 읽거나 공부한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엄청난 지식을 얻을 수 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지혜는 지식을 토대로 사색하고 고민하고 또한 경험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수많은 실패를 통해서 얻게 되기도 합니다.
지혜는 중요합니다. 공자가 지혜로운 자는 ‘활동적’이라고 말한 것은 그만큼 움직이면서 경험을 하고, 적극적으로 지식을 습득해야 함을 의미합니다.〈인디아나 존스〉시리즈 영화에서 존스 박사가 학생에게 이렇게 말했죠. “고고학을 제대로 배우려면 도서관에서 나가야 하네.”라고 말이죠. 그만큼 발로 뛰는 공부도 필요합니다.
끊임없이 변하면서 배우는 지혜와 남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인의 정신
‘인仁’은 어떠한가요? 맹자가 말한 ‘성선설’과 같이 사랑과 자비는 타고난 것일까요? 물론 인자함을 타고난 사람도 있지만 역시 ‘배움’과 ‘경험’을 통해서 체득하고 강화할 수 있습니다. 공자가 수많은 제자를 통해서 ‘인’을 설파한 것도 배움을 통해서 어진 마음과 사랑을 배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책과 설교를 통해서 ‘사랑’의 마음을 심어줍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진 마음을 가르쳐도 잘 듣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마치 공자가 14년 동안 천하를 주유하면서 제후들에게 통치의 이념으로 ‘인仁’을 강조했지만 그들이 듣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만큼 ‘인’이라는 것은 듣기는 쉬워도 실제로 체득하기는 힘듭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좋은 말씀을 듣고도 실제 이것을 실행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공자가 마지막 구절에서 “지혜로운 자는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장수한다”라고 말한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공부하고 배우고, 지혜를 키우는 것은 즐거운 인생입니다. 그러면서 사랑의 정신인 ‘인’을 베푸니 행복하고 오래 살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기 때문에 더 오래 살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50이 되어서 주변을 둘러보면, 산과 물처럼 넓은 포용력과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면서, 끊임없는 탐구 정신을 갖는 어른이 많지 않다는 점을 발견합니다. 그동안의 경험과 지식에 의존해서 편향된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는 점이 아쉽기도 합니다. 정체되지 않기 위해서 변화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끊임없이 변하면서 배우는 ‘지혜’와 남을 인정하고 포용하고 사랑하는 마음인 ‘인’이 필요한 때입니다. 역시 바닷가에 인접한 산이 되는 것이 나아 보입니다. 그러면서 물의 변화와 산의 넓은 포용과 사랑을 실천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