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아니,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많다고 하는 편이 맞을 듯하다. 부모님의 잔소리, 선생님의 공부 압박에서 벗어나 친구들과 우리들만의 세상을 알차게 쌓아가다가 예상치 못하게 배신을 당하는 경우가 생긴다. 뭐랄까, 학창 시절의 배신이라 하면 이 친구와 친하게 지내다가 어느 날부터 다른 친구와 친해졌을 때 듣는 “이런 배신자”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만큼 당시에는 순수하다 못해 티 없이 맑은 샘물 같은 영혼으로 살았던 것 같다. 내가 아닌 다른 친구와 더 친해졌을 때 갖게 되는 상대적 박탈감과 서운함으로 잠을 못 이룰 정도였으니까. ‘이 얼마나 순수한 행동이란 말인가.’
하지만 성인이 되고 나니, 정확히는 첫 번째 스무 살에 접어들고 나니 배신의 강도는 상상했던 이상이 되어버렸다. 상상조차 못했던 배신감에 치를 떨기에 앞서 나를 망가뜨릴 수도 있는 현실과 냉정하게 마주해야 했다. (그 놈의) 돈 문제가 끼어드니 이건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친구야, 알바비 나오면 갚을게, 1만 원만 빌려주라.” 이것이 시작이었다. 1만 원은 2만 원으로 뛰고, 2만 원은 5만 원으로 뛰고… 그러다가 10만 원. 그 이후로는 친구의 잠수.
거두절미하고, 배신감이 컸다. 돈을 받지 못했다는 분노보다 믿음이 깨지고, 의리가 사라지고, 친구를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어른이 되면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부모님도, 선생님도 입시를 위한 공부에는 열정적이셨지만, 정작 사회생활을 해나가는 데 알아야 할 공부에는 뒷전이었던 것이다.
누군가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고 애써 위로했지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책으로도 배우지 못한 그런 상황은 너무나도 힘들었다. 학교에서 이러한 공부도 반드시 정규교과로 채택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회생활 공부.’
그런데 스무 살은 한 번의 실패와 아픔을 겪었다고 해서 곧바로 지독한 개인주의자가 되지는 못하더라. 여전히 순수함의 울타리 안에서 폴짝 뛰어다니는 한 마리의 온순한 어린 양일 테니까.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는 예쁘고 해맑은 그 양은 비바람에 쓸리고, 야생동물에 겁먹으면서 점점 두꺼운 양털을 껴입게 되는 것이다. 발톱은 단단해지고, 눈매는 매서워진다. 그렇다.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인생은 아름답지만,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매순간 버둥거리는 한 마리 양인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가면을 써 버렸다. 사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다. 모두가 가면을 써 버린다. 자신의 진짜 내면을 감추어버리고, 타인에게는 강한 사람이라 보여줘야만 하는 가면 말이다. 내가 나라고 솔직하게 밝힐 수 없는 그런 가면.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부터 그런 가면을 쓰고 살아왔다. 고요하면서도 평탄하게 살 수 있었던 울타리 안의 삶을 뒤로 한 채, 괜히 호기심을 갖고서 천방지축 울타리 밖을 뛰쳐나와 들개처럼 살아야만 했던 그 결심 이후로는 줄곧 가면을 써야만 했다. 가면은 하나만 쓰는 것도 아니었다. 이 상황에 맞추어서는 이 가면을, 저 상황에 맞추어서는 저 가면을. 중국 전통극 중 하나인 변검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나도 모르게 타인 앞에서 힘들다는 내색을 비추기 싫었다. 아프지만,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마음의 상처가 곪아가고 있어도 타인의 목소리를 듣기가 두려웠다. 나를 약한 사람으로 치부할까 봐 그런 모습을 보이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내면의 상처는 깊어만 가고, 치유하는 데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데도 쉽게 끄집어낼 수 없었다. 즉 가면을 벗을 수가 없었다.
‘나한테는 말해도 괜찮아. 비밀로 할게’라는 믿음의 신호를 맹목적으로 믿었다가 상처를 받은 적도 수없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것일까. 사람을 너무 믿는 것일까’ 하는 자책도 수없이 했다. 그러다가 가면을 하나 더 써버리는 것이다.
결국 타인과 일정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내면의 깊은 이야기를 끄집어내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다. 이것은 몸부림이었다. 그 사람이 정말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나는 잘 듣는 사람으로 비쳐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말을 구구절절 끄집어내기보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절대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잘 들어주는 사람이 태생적으로 잘 들어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 DNA를 품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아픔이 많고, 내면에 상처가 많은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다 보니 ‘내 이야기’보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데 영혼이 짜맞춰져버린 것이다.
그렇게 첫 번째 스무 살 이후로 켜켜이 쌓여만 가는 숱한 가면들. 하지만 두 번째 스무 살이 되고나니 가면들을 하나둘씩 벗어버리고 싶었다. 끝도 없는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줄 알았는데, 옆도 보고 뒤도 보고 가끔씩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무심한 척 넘기게 된 것이다. 좀 더 나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고 싶었다.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사람을 만날 때도 “난 너랑 안 맞는 것 같아”라는 말을 당당하게 하고 싶었다. “굳이 너랑 친해져야 하니”라는 말도 속 시원하게 하고 싶었다.
싫은데 좋은 척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인간관계는 많이 좁아졌다. 졸졸졸 바위 틈새로 겨우 흐르는 물줄기보다 좁아져 갔다. 하지만 깊이는 태평양의 심해 못지않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닫혔던 마음을 겨우 여는 데 한 번의 스무 살이 흘렀던 것이다. 20년.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평생 배워야 한다. 지식이든 지혜든, 행운이든 불운이든, 상처든 기쁨이든 죽기 전까지 배운다. 그것이 배움이 아니라 깨달음일지라도.
나는 좋다. 그렇게 배워 나간다는 것이. 모든 걸 빨리 ‘배워 치우고 싶어 하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하나씩 둘씩 배워 나가는 것이 좋다. 그렇게 배워 나가면서 나는 하나씩 가면을 벗어버린다. 좀 더 나에게 솔직해지는 것이다. 그것만으로 나는 충분하다.
오늘날 이렇게나 복잡하고도 정신없으며, 시시각각 변하기만 하는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분이라 우리의 마음을 깊게 이해하시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공자는 《논어》의 ‘위정편(爲政篇)’에서 자기 학문과 수양의 발전 과정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吾十有五而志于學, 오십유오이지우학)
서른 살에 자립했으며(三十而立, 삼십이립)
마흔 살에 미혹되지 않게 되었다(四十而不惑, 사십이불혹)
쉰 살에 천명을 알았고(五十而知天命, 오십이지천명)
예순 살에 귀가 순해졌으며(六十而耳順, 육십이이순)
일흔 살에 마음 내키는 대로 했으나 법도를 넘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칠십이종심소욕 불유구)
공자의 이 말에 따라 15살을 지학(志學), 30살을 이립(而立), 40살을 불혹(不惑), 50살을 지천명(知天命), 60살을 이순(耳順), 그리고 70살을 종심(從心)이라고 부른다.
어디서 한 번은 들어봤음직한 말일 것이다. 스무 살을 지칭하는 표현이 없어서 아쉽기는 하지만, 여하튼 마흔이 되면 마음이 흐려져 갈팡질팡하지 않게 된다. 차곡차곡 쌓아올려 곳간이 터져나갈 것만 같은 경험들 덕분이다. 더불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기가 두려워 써야만 했던 가면들 덕분이기도 하다. 갈팡질팡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나다워지고 싶어지는 나이. 더 이상 나답지 않은, 타인인 척하기 싫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내가 내 인생에서 가장 좋다.
또한 가면을 써야 했지만 그 당시의 나로 다시 돌아가겠느냐고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결코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부서지고, 쓰러졌으며, 다치고, 망가졌을지라도 그때의 내가 절대 부끄럽지 않다. 그때의 내가 있었으니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니까.
그러니 지금은 홀가분하다. 한 꺼풀씩 떨어져나가는 가면들을 볼 때마다. 그렇게 나는 두 번째 스물을 맞이했다. 세 번째 스물이 오면 더욱 당당해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