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사는 남자의 일상의 단면을 위한 한 권의 책과 한 울림의 노래
미식(美食)과 함께 가을에 만나요
천고마비(天高馬肥).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 가을이 왔다는 뜻일 테지. 오늘날 도시에서는 쉬이 말을 볼 수 없다. 속담에서처럼 말은 전부 제주도로 내려갔을 테지. 대신 살찐 사람들만 쉼 없이 부딪힌다. 이제 4자성어를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천고인비(天高人肥).
가을이 오면 왜 이렇게 배가 고플까? 식욕은 바로 앞 계절인 여름과는 분명 다르다. 폭식과 야식을 불러일으키는 먹방은 호환마마보다 무섭고, 블로그 맛집 탐방기는 중독성 강하다. 바깥 온도가 밥 먹기 좋도록 선선해서? 수확의 계절이어서? ‘손이 가요, 손이 가’ 하는 CM송이 머릿속에서 붕붕 부유한다.
‘마흔 즈음에’를 바라보는 남자로서 10년 넘게 자취생활을 하다보면 나름 규칙이 생긴다. ‘집에서는 절대 밥해먹지 말 것.’ 자취를 처음 시작하는 당신이라면 무슨 소리냐고 역정을 낼지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한 법. 설거지, 쓰레기 분리수거, 식기구입, 당최 1인분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식재료들….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박따박 때가 되면 밥 차려주시고, 눈치 볼 필요 없이 다 먹은 식기를 싱크대에 올려두기만 하면 되고, 쓰레기는 알아서 묶어두시면 버리는 곳에 갖다놓기만 하면 되는, 부모님과 함께 살던 그때가 지독하게 그립다.
성욕과 함께 인간의 대표 본능이라 할 수 있는 식욕은 언제나 나를 설레게 한다. 그래서 먹방책 중 최고봉이자 ‘솔로 미식가의 도쿄 맛집 산책’이라는 부제를 달고 출간된 <고독한 미식가>를 에피타이저 개념으로 LTE급 속도로 읽었다. 초밥, 야키만주, 타코야키, 사누키우동, 장어덮밥 같은 일상의 음식(?)이 손에 잡힐 듯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게 집밥이라고 했던가? 일본에서라면 그렇게 말해도 손색없는 한 끼 식사가 어쩜 이렇게 종이 위에서 나풀거릴 수 있는 걸까. 그 음식들만 먹으러 다녀도 한 달은 충분히 해결되고도 남을 듯.
무역업자, 독신주의자, 미식가로 그려진 만화 속 주인공 이노가시라 고노는 먹는 즐거움뿐 아니라 혼자 먹기가 익숙한 일본인들의 모습까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제 열도는 먹는 그 자체 의식에만 집중할 뿐 다른 거추장스러운 고민을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곧 이 땅에서도….
가을이다. 글을 쓰고 있다가도 먹을 게 떠오른다. 특히나 점심시간이다. 날씨가 오죽 좋으랴. 살랑거리는 가을 남자, 윤건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가을에 만나’. 해운대 밤바람, 파도거품, 달맞이, 맥주 한잔, 백사장. 이렇듯 로맨틱한 감성 한껏 자극하며 귓가를 간질거리는 단어로 가사를 채운 그가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그렇게 그녀가 만나고 싶다고.
나라면 여기에 하나의 행위를 더하겠다. 그런 그녀와 이렇게 맛있는 가을 식사를 함께하고 싶다고. ‘아, 가을아 멈추어다오. 나의 식욕일랑 빼앗지 말아다오. 계절의 여왕, 봄이라도 내어주겠소.’ 과연 이 글을 읽고서 식욕이 올라올까나? 맛깔스럽게 유혹하는 글이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