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안 되는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때, 나는 위로를 받는다. 국어사전에 '자존감'을 검색하면, '스스로 품위를 지키고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이라고 나온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어쩌면 자존감 향상은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비롯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사람 인 자에 사이 간 자를 쓰는 '인간'이기에, 필연적으로 무리에서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를 품을 수밖에 없다. 물론 자아를 실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든 싫든 내가 속한 공동체에 기여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는 경우도 많을 게 분명하다.
처음에는 시답잖은 농담이나 던진다. 예전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나는 애초에 내가 당사자도 아니어서 사람들의 비애를 온전히 감당하지 못할뿐더러, 타자로서 그 고통을 해결해 줄 역량이 없다고 믿는다. 상대방에게 도움도 되지 않는 내가, 그 분위기를 타파하는 데에는 농담이나 던지는 게 최선이지 않을까라고, 속으로 되뇐다. 그때마다 나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의 루드비크가 된다. 속은 연하디연한데, 겉으로나마 단단해 보이기 위해 마르게타에게 헛된 농담이나 했던, 루드비크 말이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루드비크는 자신의 불안감을 감추려 의도했던 가벼운 농담이 굴레가 되어 돌아왔다는 점이고, 나는 감사하게도 아직까지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분위기가 사뭇 진지해져 농담 따위는 필요가 없어지고, 나는 또다시 침묵한다. 언어가 소통의 기능을 유지하려면 발화에 대응하는 경청이 필요하다. 쌍방이면 소통이고, 일방이면 통보다.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어찌 손톱만큼이나 마 그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상대방을 완벽하게 동정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그러려고 노력이라도 하는 행위가 경청인 셈이다. 상대방 눈에 비친 나는 애꿎은 술잔이나 쳐다보는, 그저 매사에 무관심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겠으나, 제 딴에는 상대방을 이해하려 애쓰는 중인 셈이다. 농담을 넘어 경청을 하는 나는 루드비크가 아니라, 멀리서나마 그를 지켜보는 헬레나가 된다. 헬레나는 루드비크를 조우할 때마다 항상 조심스럽고, 자신의 행동 때문에 상대방으로부터 멀어질까 걱정이다. 혹시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상처받지는 않을지, 내 말을 곡해하지 않을지 생각하며 침묵하는 것이다.
긴 경청 끝에 입을 연다. 조심스러워서 최대한 정제된 표현을 하려 애썼다. 정답이 없는 대화의 향연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위로가 안 될 것 같고, 상대방이 듣고 싶은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 정말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라는 걸 강조한다. 하지만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은 마르게타가 아니었다. 내 농담에 악의가 없음을 잘 알 뿐만 아니라, 고심 끝에 전하는 내 의견을 소중히 여긴다. 이로써 소통이 완성된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위로를 받고, 위로를 하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로 본인의 존재 가치를 재확인함으로써 역으로 위로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