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새로운 무대

J_Part 4. 균열의 시작

by 직장인C

아침 공기가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사람들은 보통 이런 날씨를 두고 “겨울이 오려나봐요” 같은 말을 하지만
나는 그런 계절의 변화를 잘 느끼지 못한다.


내가 느끼는 건 사람 사이의 온도 변화다.
그게 훨씬 더 빠르고 정확하다.

그리고 오늘, 가장 먼저 눈에 띈 온도 변화는 L이었다.


사무실 문이 열리고 L이 평소보다 훨씬 천천히 들어왔다.

그녀는 나를 보고 “좋은 아침이에요”라고 웃었지만 입꼬리와 눈매의 움직임이 따로 놀았다.
누가 봐도 ‘지쳐 있는 사람의 웃음’이었다.


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피곤해 보여요. 어제 늦게 잤어요?”


그녀는 순간 움찔하며 말했다.

“네… 잠이 좀 안 와서요.”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겠지.

하지만 나는 다르게 반응했다.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살짝 쓸어올린 눈썹,

걱정하는 듯한 표정,
조금 낮춘 목소리.

그 모든 요소가 그녀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풀어지게 만든다.


그리고 역시나, L은 한순간에 방어막을 내려놓았다.

“그냥… 요즘 조금 자신이 없어져서요.”


아.

나는 마음속으로 아주 조용히 미소 지었다.


드디어.
첫 균열.


점심시간 가까워지자 L이 다시 다가왔다.

“J님, 오전에 드렸던 파일 한번만 봐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일부러 조금 망설이며 말했다.

“음… 봐줄 순 있는데... 그 전에 이 말부터 해야겠다.”


L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L님, 혹시... 팀장님이 어제 말했던 보고 방식 때문에 속상했던 거예요?”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아니요! 전혀요!”

“괜찮아요. 숨기지 않아도 돼요.”

나는 조용하게 의자를 L 쪽으로 더 붙였다.
L이 스스로 내 표정과 호흡을 읽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


“사람들 표정 보면 알 수 있어요.
팀장님이 무심코 한 말이라도 L님은 그거 마음에 담아두는 스타일이잖아요.”

L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그 순간이었다. 그 흔들림 하나로 나는 그녀가 ‘내 말에 영향을 받는 상태’라는 걸 확신했다.

그리고 나는 아주 천천히 말을 덧붙였다.


“저도 처음 왔을 때... 음, 비슷한 느낌이 있었어요.”

이번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팀장은 나에게 아무 문제도 준 적이 없다.
하지만 L은 내가 하는 말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이해돼요. L님이 요즘 조금... 힘들어하는 게.”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츠러들었다.


“그런데 L님.”

나는 살짝 웃었다.

“이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요. 괜히 오해 생기니까.”

그 말 한 줄은 L을 완전히 나에게 고립시키는 첫 고리였다.


오후 회의에서 L이 발표를 맡았다.

평소보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전달 내용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그럼에도 팀장은 점잖게 말했지.

“여기 문장만 조금 다듬으면 더 좋겠어요. 정확성이 중요하니까요.”


그는 정확히 L에게 문제가 있다는 게 아니라 콘텐츠 전체의 방향을 말한 것이었다.
그런데 L은 그걸 자신에게 직접 향한 비판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회의실을 나오며 흐트러진 표정의 L을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네…”
하지만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L님, 팀장님 말 너무 신경 쓰지 마요.”

그녀의 눈이 나를 향했다.

“저도 예전에 비슷하게 들어본 적 있어요. 그분... 때로는 너무 직설적이라.”

L은 작게 숨을 삼켰다.


나는 속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조금 과장된 공감은 상대에게 ‘함께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라는 착각을 만든다.

“L님이 생각하는 것보다...훨씬 잘하고 있어요.”

그 말이 떨어지자 L의 눈이 살짝 붉어졌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정말요. 그러니까 너무 흔들리지 말아요. 누구보다 L님이 제일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는 것,
저는 알고 있어요.”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끄덕임’은 완전히 내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징표였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조명을 켜지 않은 어두운 거실에 앉았다.

나는 오늘 L의 반응 하나하나를 곱씹었다.

그 아이는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 줄에도 마음이 크게 흔들리는 아이였다.

그래서 나는 이 타이밍을 절대 놓칠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카톡을 열었다.


“오늘 많이 힘들어 보였어요. 혹시 누가 뭐 불편하게 했던 거면... 말해도 돼요.”

메시지는 바로 읽혔다.
L은 몇 분 동안 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초조해할 필요는 없다.
감정이 채워지면 결국 사람은 말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드디어,
밤 11시 42분.


“J님...사실 오늘... 좀 속상했어요.”

방문을 열어둔 듯한 말.
이제 그 문은 거센 힘을 주지 않아도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To be Continue -


이전 03화1장. 새로운 무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