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새로운 무대

J_Part 5 넌 나에게 기대야만 해

by 직장인C

밤늦은 시간 L의 메시지가 도착한 뒤로,
나는 핸드폰 화면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속상했어요.”

짧은 문장이지만 그 속에는 ‘도움받고 싶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는 감정이 분명히 묻어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팀장도, 다른 팀원도 아닌 나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나는 아주 천천히 메시지를 적었다.

“괜찮아요. L님은 잘하고 있어요. 누가 뭐라고 해도... 저는 알아요.”


보냈다.
그리고 나는 화면을 꺼버렸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
더 길게 이어가면 ‘위로’가 되지만, 짧게 끊으면 ‘의존’이 된다.

그리고 나는 의존을 원했다.


다음 날. 사무실 문이 열리자마자 느껴졌다.

L이 내 쪽으로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그녀는 선뜻 다가와 말했다.

“J님… 어제 감사했어요.”

나는 일부러 살짝 놀란 척하며 고개를 들었다.

“어제요? 아, 메시지... 그건 뭐.”


보통이라면 그냥 ‘괜찮아요’라고 말하면 될 것을 나는 굳이 말을 흐렸다.

사람은 말을 끝내지 않을 때 상대의 감정을 먼저 살핀다.
그리고 지금 L은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하는 눈이었다.


“힘들면 말해도 된다고 했잖아요.”

그녀가 먼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나는 그녀가 내 페이스에 따라오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점심시간 직전 나는 프린터 앞에서 L을 불렀다.

“L님, 잠깐 얘기 좀 해요.”

걔는 작은 새처럼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무슨 일 있었어요?”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L은 망설였다. 입술이 떨렸고, 눈은 자꾸 바닥을 향했다.


“음... 그냥... 그... 회의 때...”

나는 말끝을 채워줬다.

“팀장님 말씀?”

그녀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나는 의도적으로 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깊지도 얕지도 않은,

“아... 또 그랬구나”라고 말하는 듯한 호흡.

그 호흡 하나로 L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저... 잘하고 싶었는데... 왜 자꾸 부족하다고 느껴지는지 모르겠어요.”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어깨에 아주 가볍게 손을 얹었다.

“그건 L님이 부족해서가 아니에요.”

L의 눈이 나를 향했다.

“그냥... L님을 아직 잘 모르니까 그래요. 팀장님은 사람을 깊게 들여다보는 타입이 아니니까.”


이건 사실이 아니었다.
팀장은 누구보다 팀원을 세심히 살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L은 내 말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녀의 호흡이 부드럽게 풀어졌다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사람을 제어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약점을 공유하게 만드는 것이다.

약점을 준 게 아니라, 약점을 ‘말하게’ 하는 것.

그건 강제보다 훨씬 강력한 족쇄가 된다.


나는 휘청이는 L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혹시... 이런 감정, L님 혼자만 알고 있었어요?”

L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어요.”

“왜요?”

“말하면… 더 이상하게 보일까봐…”

나는 바로 끼어들지 않았다.
그녀가 스스로 말을 이어가길 기다렸다.


“그리고... 솔직히... 다들 잘하는 것 같아서... 저만 부족해 보일까봐...”


바로 그거다.

그녀는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었고, 나는 그 고립의 틈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L님. 저한테는 말해도 돼요.”

그녀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저는... L님 편이니까요.”

그 말에 L은 미세하게 숨을 들이켰다.

사람은 ‘편’이라는 단어에 약하다. 누군가 자신이 편이라고 말하면 그 사람을 쉽게 의지하고 믿게 된다.

그리고 L은 지금, 가장 믿고 싶은 사람을 찾고 있었다.


퇴근 후 L이 자리를 정리하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J님... 혹시 제가 잘못한 게 있으면...그때그때 말해주세요.”

그 말은 이미 관계가 뒤집혔다는 뜻이었다.

이제 “L이 나의 평가에 의존하게 됐다”는 말이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말해줄게요. 그런데... 딱 한 가지는 명심해요.”

L의 눈이 유리잔처럼 깨질 듯 떨렸다.


“아무한테도... 우리 얘기 말하지 마요.”

그녀의 숨이 멈칫했다.


“네... 알겠어요.”

“오해받으면...L님만 힘들어져요.”

그 한마디는 L을 팀 전체에서 조용히 떼어내기 위한 첫 번째 칼질이었다.

그녀는 그걸 모른다.

하지만 이미 늪에 발목이 들어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지하철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상대가 불안할 때 나는 평온하다.

상대가 흔들릴 때 나는 단단해진다.

그리고 상대가 ‘나 없으면 더 흔들리는 사람’이 되면 그제야 나는 조용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L은 지금 그 경계선 위에 서 있었다.

아직 완전히 넘어온 건 아니다.
하지만 조금만 밀면 아주 쉽게 떨어질 수 있는 지점.


그녀는 아직 모른다.

이 모든 게 의도된 것이라는 걸.

그리고 더 모른다.

이제부터 자신에게 다가올
더 깊고 진한 고립의 그림자를.


나는 핸드폰을 꺼내
지나가는 광고판의 빛 속에서
천천히 미소 지었다.

“이제 시작이야.”


-To be continu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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