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조용한 균열

팀장_Part 5. 맞춰지는 조각들

by 직장인C

그날 L은 아침 회의부터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기존이라면 모든 발언을 메모하며 빠르게 따라오던 아이인데
그날은 계속 말문을 열지 못했다.


회의가 끝난 후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L님, 잠깐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녀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
그 반응은 놀람이 아니라 “또 뭔가 문제가 생긴 걸까?”라는 공포에 가까웠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냐, 그냥 요즘 어떠냐고. 표정이 많이 피곤해 보여서.”

그러자 L은 한참 동안 무릎 위의 손만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팀장님... 오늘도... 괜찮지 않았어요.”


그녀가 처음으로 “힘들다”는 뜻의 문장을 말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근데 제가 잘해야 하는 거니까요.”


그날 오후, L은 아주 작은 실수를 했다.

문서 날짜를 하루 잘못 적은 정도. 그런데 그 실수에 대한 그녀의 반응은 비정상적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왜 이렇게 실수를 하는지...”

나는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야, 그 정도는 누구나 실수해요. 과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그러자 L은 벌 받는 아이처럼 어깨를 오돌도돌 떨었다.


“아니에요, J님이... 아니, 팀장님이 실망하실까 봐…”

순간, 나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내가 L에게 ‘실망’할 만한 행동을 한 적도 없는데 그녀는 왜 이 단어에 이렇게 예민한 걸까?

마치 누군가 “팀장님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미 그녀에게 반복해서 말한 것처럼.


점심시간이 끝나갈 즈음 J가 L 자리로 다가왔다.


“L, 그 자료는 내가 이야기한 대로 정리했지?”

말투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부드러움 뒤에 확인과 통제가 섞여 있었다.

L은 너무 빠르게 대답했다.


“네! 아까 말씀해주신 방식으로... 바로 수정했어요.”

그 자리에 있던 나는 지금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방금 내가 L에게 이야기한 사항과 J가 말한 사항이 서로 반대였기 때문이다.

나는 조심스레 말했다.


“L님, 그 자료는 기존 방식 그대로 하면 돼요. 바꿀 필요 없어요.”

그러자 L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그리고 J는 아주 잠시, 정말 1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이지만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 표정은 “왜 네가 끼어들지?” 라는 듯한, 얄팍한 불쾌감이었다.

순식간에 다시 미소로 돌아왔지만 나는 분명히 봤다.

J는 말했다.


“아, 제가 예전에 하던 방식으로 L님한테 알려준 거였어요. 팀장님이 말씀하신 방식으로 하면 되겠네요.”

말은 공손했지만, 그 속에는 “내가 틀린 게 아니라 팀장님이 몰랐던 거예요.” 라는 기묘한 기운이 있었다.

그리고 L은 그 두 말 사이에서 숨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있었다.


오후에 L 자리를 지나가다가 나는 문득 그녀의 책상 위를 보게 되었다.

포스트잇 몇 장이 규칙적으로 붙어 있었는데 메모 내용이 이상했다.


“말 조심하기”

“웃을 때 조심”

“보고는 먼저 전달”

“팀장님이 뭐라 하기 전에 내가 먼저 확인”


마지막 문구에서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L에게 한 번도 부정적인 피드백을 선제적으로 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내가 그녀를 “혼내는 사람”처럼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다.

누가 그 이미지를 그녀에게 심어 넣은 걸까?

나는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즈음 사무실 복도에서 J와 L이 조용히 대화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문 쪽에서 살짝 몸을 멈췄다.

무의식적으로 귀가 그쪽으로 향했다.


“L님, 오늘 오전에 표정 왜 그랬어요? 혹시... 또 누군가가 뭐라고 한 거예요?”

L은 얼른 말했다.


“아... 아뇨... 그냥... 제가 잘 못해서...”

J의 목소리가 낮아지며 더 부드러워졌다.


“그러니까. L님은 조금만 더 잘하면 돼요. 누가 뭐라고 해도 신경 쓰지 말고.
특히... 윗사람들 말은 너무 진지하게 듣지 말고.”


윗사람.
그 말은 거의 나를 지칭하는 듯했다.


그리고 L은 조용히 말했다.


“네... J님 말만 들을게요.”

그 대답을 듣는 순간나는 숨이 턱 막혔다.


L의 세계에서, 나는 이미 ‘문제의 원인’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J를 통해 잘못된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복도에 서서 그 대화를 끝까지 듣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L이 갑자기 위축된 것도, 혼자만의 두려움 속에 갇힌 것도,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도, 모두 우연이 아니었다.


조용한 침식.
그건 이미 시작된 지 오래였고 나는 그간 그 변화를 단편적으로만 보고 있었다.

조각이 맞춰지는 순간 나는 한 가지 사실을 확신했다.


이건 L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가 그녀의 감정, 판단, 행동을 아주 천천히...하지만 확실하게 조종하고 있다.


나는 드디어 개입하기로 결심했다.


그날 밤 나는 팀장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L의 변화는 일시적 피로가 아니다. 반복적 통제의 흔적이 보인다. 더 늦기 전에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때는 내가 몰랐다.

내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 J 또한 그 사실을 동시에 감지하고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라는 걸.

그리고 그 움직임이 훗날 더 큰 파국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도.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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