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_Part 4. 두 개의 분위기
L의 표정이 처음 이상하다고 느낀 건 그녀가 복사기를 사용하던 어느 오후였다.
평소의 L이라면 대기 시간에 옆 사람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던 아이였다.
그런데 그날, L은 복사기 앞에 서서 서류를 들고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종이가 걸린 것 같아 나는 무심코 물었다.
“L님, 복사기가 잘 안 돼요?”
그녀는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풀려 있었다.
“아... 아니에요. 잠시 생각하느라...”
하지만 그녀의 손은 아직 복사 버튼에 닿지도 않은 채 떠 있었다.
그 모습은 생각에 잠긴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다음 행동을 허락받지 못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오늘 회의 어땠어요?”
내 질문에 그녀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아... 네, 저는... 괜찮았어요. 제가... 잘하면 될 것 같아요.”
말끝마다 머뭇거림, 불필요한 자기비하, 그리고 ‘제가 더 잘해야 한다’는 빠지지 않는 결론.
그건 누군가의 비판을 너무 오래, 너무 자주 들은 사람의 패턴이었다.
“여기 이 문장 다시 보면 좋겠어요.”
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럴 때 L의 반응은 점점 더 극단적으로 빨라졌다.
“아! 네! 제가 잘못한 것 같아요.”
“제가 바로 고칠게요! 죄송합니다.”
나는 아직 ‘잘못’이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언제나 먼저 죄책감을 꺼내 놓았다.
처음에는 빠릿빠릿해서 좋다고 생각했지만, 점점 그 반응이 “훈련된 반사신경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회의가 끝나고 L은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말했다.
“팀장님... 저... 요즘 좀 힘든가 봐요.”
나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힘든 일 있어요? 말해도 돼요.”
순간, L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몇 초 동안 말문을 닫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닌데요. 아니에요. 제가 그냥... 부족해서 그래요.”
무언가를 말하려다 갑자기 방향을 바꾼 느낌.
나는 힌트를 조금 더 줘 볼까 고민하다가 가볍게 농담을 섞어 말했다.
“J님이 혹시 뭐라고 했어요? 가끔 너무 솔직해서 사람 놀라게 하잖아요.”
L은 그 말을 듣자마자 놀란 토끼처럼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그럴 리 없어요! J님은... 저 잘 챙겨주세요. 저...J님이 있어서 버티고 있는 거예요.”
문장 전체의 내용은 J를 두둔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투에는 누군가에게 배운 “정답”을 읊는 듯한 공허함이 있었다.
‘그 사람 덕분에 버티고 있다.’
이 문장은 사실 가장 많이 가스라이팅당한 사람들의 문장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가슴이 서늘해졌다.
바로 그 지점부터 변화는 너무 느리게, 너무 자연스럽게 진행됐기 때문에 서로 연결해서 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점심자리 변화, 조용해진 말투, 조심스러운 말끝 , 지나친 죄책감 , J의 미묘한 통제적 발언이 모든 것이 조각처럼 흩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조각들은 하나로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날, 나는 L이 가방을 싸들고 퇴근하는 모습을 문가에서 지켜보았다.
그녀는 휴대폰을 보면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는데, 표정이 너무 불안해 보였다.
지문 하나 누를 때마다 누군가의 평가를 기다리는 듯한 얼굴.
그 표정은 오늘 하루 일어난 일을 정리하는 표정이 아니라,
“오늘도 잘했나요?”
“저 잘못한 거 없죠?”
라고 묻는 표정이었다.
윗공기는 대화를 나누고 웃는 평범한 분위기.
아래공기는 작은 긴장과 보이지 않는 규칙들로 얼어붙은 분위기.
그리고 L은 그 아래공기 속에서 조용히 숨을 참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이건 그냥 스트레스 문제가 아니다. L과 제대로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때는 아직 몰랐다.
이미 그 시점에서 J는 L의 세상을 거의 완성해 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내가 무언가를 더 알아내기 전에 L은 이미 ‘J가 심어놓은 현실’ 속에서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그 변화를 겨우 눈치채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To be Contin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