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내 손에서 미끄러지는 것들

J_Part 3. 고립은 조용히 완성된다.

by 직장인C

나는 L을 직접 몰아붙이지 않았다.
그건 너무 서툰 방식이다.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거나, 공개적으로 혼내는 건 마지막 수단이다.

아니, 사실 그런 방식은 아예 쓰지 않는 게 낫다. 사람들은 그걸 ‘폭력’이라고 부르니까.


대신 나는 기다렸다.

회의실에서, 복도에서, 점심시간에.
L이 말을 걸어오기를.


하지만 이제 L은 먼저 말을 걸지 못했다. 그걸 나는 알고 있었다.
사람은 눈을 마주치지 못할 때 이미 반쯤 무너진다.

요즘 L은 나를 볼 때마다 시선을 한 박자 늦게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괜히 손에 쥔 펜을 만지작거리고, 노트에 적지도 않을 메모를 하는 척을 했다.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예전에도 이런 표정을 봤으니까.


“L님, 요즘 표정이 안 좋아 보여요.”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주변에는 JD도 있었고, H도 있었다. 일부러였다.

이 말은 둘만 있을 때 하면 안 된다.

증인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L은 ‘내가 예민해서 그렇게 느끼는 건가’ 하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

L은 놀란 토끼처럼 고개를 들었다.


“아... 그런가요? 괜찮아요, J님.”

괜찮다는 말.
언제나 그 말이 먼저 나오는 사람은, 사실 괜찮지 않다.


“괜찮을 리가 없죠.”
나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팀 분위기가 요즘 좀... 그렇잖아요. 다들 예민해져 있고요.”

JD가 고개를 끄덕였다.
H도 아무 말 없이 맞장구를 쳤다.

그 순간, L의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앉는 게 보였다.

혼자가 아니구나, 라고 느꼈을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이렇게 느꼈겠지.


‘나만 이상한 게 아니구나.’

이게 중요하다.
사람은 자기 감정이 ‘개인적인 문제’라고 느끼는 순간 가장 쉽게 무너진다.

반대로, 그 감정이 ‘환경 때문’이라고 믿게 되면, 책임을 외부로 돌리면서 누군가에게 의지하게 된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당연히 나였다.


“L님이 요즘 힘들어 보이는 건, 팀장이 너무 많은 걸 요구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나는 일부러 팀장을 직접 비난하지는 않았다.
대신 애매하게 말했다.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것 같다’, ‘현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우리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 말은 칼날처럼 날카롭지만, 손잡이가 없는 칼이다.
누가 휘두르는지 보이지 않는다.


L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이 말이 어디로 향하는지.

그날 이후로, L은 점점 팀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다.

예전에는 다른 팀 사람들과도 자연스럽게 섞여 앉던 점심시간에, 이제는 늘 우리 팀 테이블에만 앉았다.

그것도 내 맞은편이 아니라, 한 칸 비껴난 자리였다.

나는 그걸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여기 앉으세요, L님. 저기 말고.”


한 번.
두 번.
세 번.

그렇게 자리는 굳어졌다.

사람은 자리를 바꾸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니까.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L님, 혹시... 제가 불편하게 한 건 아니죠?”

그 질문을 던질 때,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L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에요! 전혀요, J님.”

그 말이 나를 안심시켰을까?
아니다. 그건 확인이었다.

이 사람은 이미 나를 부정하지 못한다.


이제 남은 건 하나였다.
L이 스스로 ‘내가 뭔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그날 밤, 나는 팀 카톡방에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방을 나갔다.

알림은 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분명히 무언가가 움직였을 것이다.

왜 나갔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혹시 내가 뭘 잘못한 건 아닐까?

그 질문은 곧 하나의 사람에게로 향한다.


L.


나는 알고 있었다.
내일쯤이면, 늦어도 모레쯤이면, L은 먼저 연락해올 것이다.

사과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더라도,
그 얼굴과 태도는 이미 사과와 다르지 않을 테니까.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L은 아직 그걸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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