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내 손에서 미끄러지는 것들

J_Part 4. 사과는 말이 아니라 태도로 시작된다.

by 직장인C

다음 날 아침, L은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 있었다.
나는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인사를 건네지도 않았고,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L은 몇 번이나 내 쪽을 힐끗거렸다.


사람은 무시당할 때 가장 크게 흔들린다.
특히, 어제까지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던 상대에게서 받는 무시는 더 그렇다.

회의가 시작되었을 때, L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반 톤 낮아져 있었다.


“이 부분은... 제가 다시 한 번 정리해보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반박하지도 않았다.
대신 메모를 하는 척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중요했다. 평가도, 지적도, 칭찬도 하지 않는 상태.
사람은 그 침묵 속에서 스스로를 심문한다.


‘내가 뭘 잘못했지?’
‘어제 무슨 말을 했었나?’
‘혹시 팀장에게 바로 보고한 게 문제였나?’


회의가 끝나자 L은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다른 팀원들이 하나둘 나가고, JD와 H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을 때,
L은 여전히 노트를 정리하는 척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L님, 잠깐 얘기할 수 있을까요?”

그 목소리는 차분했고, 표정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L은 그 한마디에 눈에 띄게 굳었다.


회의실 문을 닫자, 갑자기 공기가 무거워졌다.
침묵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나는 의자를 끌어당기지 않았다.
서서, 창가 쪽을 바라본 채로 말을 꺼냈다.


“요즘... 팀 분위기가 좀 어수선하죠.”

L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요, L님을 걱정해서 드리는 말이에요.”

걱정.
이 단어는 언제나 훌륭한 무기가 된다.


“L님이 요즘 많이 위축돼 보여서요. 혹시... 저 때문에 그런 건 아니죠?”

그 질문은 정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정을 요구한다.


“아니에요, J님. 그런 건 아니에요.”

역시나였다.
사람은 이미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 때, 상대를 비난하지 못한다.


나는 그제야 L을 바라봤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는 얼굴.
손을 꼭 쥐고 있는 자세.


“다행이네요.”
나는 작게 웃었다.

“괜히 제가 예민하게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

그 순간, L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잠깐 스쳤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다만... 팀장님이 요즘 L님을 조금 다르게 보시는 것 같아서요.”

L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마 L님도 느끼셨을 거예요. 예전처럼 바로바로 반응을 안 해주시잖아요.”

나는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대신 ‘현상’만을 나열했다.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요.”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팀장님은 이런 걸... 태도의 문제로 보시는 것 같아요.”

태도.

이 단어는 모호하고, 그래서 더 무섭다.
기준이 없고, 설명도 없으며, 반박도 어렵다.


“L님이 잘못했다는 건 아니에요.”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다만, 오해가 쌓이면... 그건 L님에게 더 불리하잖아요.”

L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사과라는 말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이미 마음속에서는 수없이 반복되고 있었을 것이다.


‘제가 죄송해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제가 조심했어야 했어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제가 괜히 나섰다면 미안해요.”
나는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L님 편이니까요.”

편이라는 말.
그 말이 얼마나 잔인한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회의실을 나설 때, L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J님... 제가 더 신경 쓰겠습니다.”

사과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충분했다.


나는 그날 저녁, 다시 팀 카톡방에 들어갔다.
아무 말 없이.

알림 하나 없이도, 그 복귀는 분명히 모두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이제 L은 나 없이 팀 안에서 숨 쉬는 법을 잊어버렸다는 것을.

다음 단계는,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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