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_Part 2. 말하지 않아도 지켜지는 것들
며칠이 더 지났다.
업무는 겉으로 보기엔 문제없이 흘러갔다.
R이 맡은 자료는 큰 수정 없이 통과됐고, 일정도 지켜졌다.
그래서 더 이상하다고 느끼기 어려웠다.
하지만 작은 장면들이 자꾸 겹쳐졌다.
회의 중이었다. R이 의견을 내기 위해 손을 살짝 들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R님 말씀해 주세요.”
그 순간 R의 시선이 잠깐 옆으로 움직였다.
J 쪽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0.5초도 안 되는.
그런데 그 짧은 멈춤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아... 아니요.”
R은 손을 내렸다.
“정리되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회의는 그대로 넘어갔다.
누구도 그 장면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날 오후 R이 올린 자료를 확인했다.
구조는 괜찮았는데 설명이 조금 부족했다. 나는 코멘트를 남겼다.
이 부분은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잠시 후 답장이 왔다.
네, 팀장님. J님과 먼저 이야기해보고 수정해서 다시 올리겠습니다.
나는 잠깐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굳이...?
내가 그렇게 생각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전까지는 그저 팀 내 역할 분담이라고 여겼다.
중간 매니저를 거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니까. 그런데 그날 이후로 비슷한 문장이 반복됐다.
J님과 상의 후에 정리하겠습니다.
J님께 먼저 공유드렸습니다.
J님 확인 후 다시 올리겠습니다.
나는 점점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업무의 첫 관문이 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 누군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J는 여전히 조용했다. 회의에서는 짧게 정리만 했고, 이견도 거의 내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순응적으로 보였다.
그래서 더 헷갈렸다. 문제가 있다면 저렇게 조용할 수 있을까?
어느 날 우연히 복도에서 R을 마주쳤다.
“요즘 적응은 괜찮으세요?”
형식적인 안부였다. R은 웃었다.
“네, 팀장님. 다들 잘 챙겨주셔서요.”
다들.
나는 그 단어가 조금 마음에 걸렸다.
“혹시 불편한 건 없고요?”
R은 잠시 망설였다.
아주 짧게.
“아뇨. 없습니다.”
그 대답은 빠르고 정확했다. 너무 정확해서 더 묻기 어려웠다.
그날 저녁 J에게 메시지가 왔다.
팀장님, R님이 아직 회사 스타일에 적응하는 중이라 제가 옆에서 조금 더 챙기고 있습니다.
혹시 제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으면 말씀 주세요.
문장은 완벽했다. 겸손했고 협조적이었고 문제 제기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짧게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게 가장 안전한 답처럼 보였다.
그날 밤 집에 가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팀에는 말하지 않아도 지켜지는 규칙이 있는 것 같아.
누가 정했는지는 모르지만, 누구도 어기지 않는 규칙.
말하기 전에 먼저 확인해야 하는 사람.
의견을 낼 때 조심해야 하는 순서.
그리고 괜찮다고 말해야 괜찮아지는 분위기.
아직은 증거가 없었다. 아직은 누군가를 불러 세울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점점 확신에 가까운 예감을 느꼈다.
이 팀은 겉으로는 평온하지만, 안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선을 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아직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To be contin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