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기준이란 이름으로

J_Part 3. 설명할 수 없는 자리

by 직장인C

처음으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말이 회의의 중심이 된 날이 있었다.

그날은 외부 팀과의 최종 방향 정리 미팅이었다.

상대 팀 팀장은 늘 그렇듯 준비가 철저했다.


“이 구조는 현장 적용 가능성이 얼마나 되죠?”

그의 질문은 곧장 R을 향했다.


나는 그 순간 공기가 달라지는 걸 느꼈다.

예전 같으면 그 질문은 자연스럽게 나를 거쳤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었다.


R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차분하게 설명했다.

수치, 근거, 예상 리스크까지 문장은 매끄러웠고 흔들림이 없었다.

회의실 안에서 상대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 방향으로 가죠.”

그 한 문장이 묘하게 길게 들렸다.


나는 그 순간 처음으로 명확하게 느꼈다.

나는 중심이 아니었다.

이건 단순한 역할 변화가 아니었다.

나는 이 팀을 설계한 사람이고, 흐름을 잡던 사람이고, 최종 판단을 내리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정리해주는 사람”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복도를 걸어 나오는데 상대 팀 팀장이 R에게 말했다.


“다음번엔 초안부터 직접 공유해주세요.”

그 말은 나를 보지 않은 채 지나갔다.

그 순간 가슴이 타이트하게 조여왔다.


이건 업무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위치의 문제였다.


나는 엘리베이터 거울 속 내 얼굴을 봤다.

표정은 아무렇지 않았다.

그래서 더 불쾌했다.

팀으로 돌아오자 JD가 말했다.


“오늘 R님 잘하던데요.”

나는 짧게 웃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다행.

그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게 이상하게 무거웠다.


그날 밤 집에 와서 메일함을 열었다.

회의록이 도착해 있었다.

회의 참석자 명단, 주요 발언자, 결론.

발언자 항목에 R의 이름이 세 번,
내 이름은 한 번.

‘정리’라는 단어와 함께.


나는 마우스를 꽉 쥐었다.

이건 작은 기록일 뿐이다.

하지만 기록은 남는다.


내가 두려웠던 건 능력이 아니었다.

능력은 늘 상대적이다.

내가 두려웠던 건 대체 가능성이었다.

사람은 없어지면 안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게 가장 안전한 자리다.


그런데 요즘 팀의 흐름은 내가 없어도 돌아갈 수 있는 구조였다.

팀장은 직접 보고를 받고, R은 설명하고, 나는 정리한다.

그 구조는 너무 매끄러웠다.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아직 아니다.

이건 일시적인 흐름일 뿐이다.


하지만 그날 이후 나는 R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제 ‘신입’이 아니었다.

그는 내 자리를 조금씩 잠식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생각은 계산이 아니라 감정이었다.


나는 이 감정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감정은 사람을 급하게 만든다.

급해지면 실수한다.

그래서 나는 다시 계산했다.


R이 드러날수록 리스크도 드러난다.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은 언젠가 넘어진다.

나는 그 순간을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그 기다림 안에는 이전과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전략이 아니었다.


이건 상처였다.

그리고 상처는 언젠가 보복을 부른다.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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