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기준이란 이름으로

J_part 5. 작아지는 사람

by 직장인C

사람은 한 번 크게 무너지지 않는다.

조금씩, 거의 보이지 않게 작아진다.


그날은 별것 아닌 수정 요청이었다.

외부 팀에서 자료를 다시 보완해 달라고 했다.

큰 문제는 아니었다. 기한도 여유가 있었다.


R은 밤까지 남아 있었다.

나는 일부러 늦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은 거의 비어 있었고, 조명은 절반만 켜져 있었다.

R의 모니터 화면에는 수정 전과 수정 후 버전이 나란히 떠 있었다.

문장이 또 부드러워져 있었다.


조금 더,
조금 더.

나는 뒤에서 조용히 말했다.


“아직도 고민 중이에요?”

R이 깜짝 놀라 돌아봤다.


“아, J님. 네... 조금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의 화면을 가만히 봤다.


“이 부분은 왜 다시 바꿨어요?”

R은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혹시... 너무 강하게 보일까 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게 중요해요.”

그리고 덧붙였다.


“괜히 튀면 좋을 게 없잖아요.”

그 말이 어떤 의미로 들렸는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R은 그날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모니터만 보며 문장을 다듬고, 수치를 다시 확인하고, 메일을 몇 번이나 고쳐 썼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이제 그는 조심한다.

이제 그는 먼저 나를 본다.

이제 그는 자기 판단보다 내 반응을 생각한다.


며칠 뒤 작은 실수가 있었다.

숫자 하나가 잘못 기입된 채로 외부에 공유된 것이다.

치명적이지는 않았지만 지적은 받았다.

회의실에서 팀장이 말했다.


“이 부분은 조금 아쉽네요.”

나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제가 중간에 한 번 더 체크했어야 했습니다.”

R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나는 먼저 말을 꺼냈다.


“제 책임입니다.”

그 말은 겉으로는 보호처럼 보인다.

하지만 책임을 대신 지는 사람은 동시에 권한도 가져간다.

회의가 끝난 뒤 R은 조용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나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


“다음부터 조금 더 신중하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날 이후 R의 말은 더 줄어들었다.

회의에서는 필요한 말만 했고, 의견은 묻지 않으면 내지 않았다.


나는 확신했다.

이제 흐름은 다시 내 쪽으로 돌아오고 있다.

팀장은 아직 모르고 있다.

이건 문제가 해결되는 과정이 아니라, 문제가 조용히 자리를 옮기는 과정이라는 걸.


R은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더 잘하려고, 덜 튀려고, 실수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 노력은 그를 더 작게 만든다.

그리고 작아진 사람은 언젠가 부서진다.


나는창밖을 보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미 시작은 끝났다.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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