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건국과 ‘박혁거세’ 설화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6
ㅡ 신라 건국과 ‘박혁거세’ 설화 ㅡ
'삼국사기'에 따르면, 삼국 중 건국 연도가 가장 빠른 나라는 바로 ‘신라’다.
'삼국사기'에는 신라건국이 기원전 57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고구려(기원전 37년), 백제(기원전 18년)보다 20~40년 정도 빠르다.
하지만 많은 역사 전문가들은 실제 역사 상황을 고려할 때 신라가 가장 먼저 건국되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삼국사기'에서 신라 건국을 가장 앞선 시점으로 기록한 이유 때문에, 편찬자 '김부식'이 신라중심 역사관을 가졌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서문에서, 역사서를 편찬할 때 "자불어 괴력난신(子不語 怪力亂神)과 술이부작(述而不作)", 즉 기이하고 신비한 이야기들은 삼가고, 기록은 하되 창작하지 않는다는 유교적 역사관에 따라 서술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실제 '삼국사기' 초반부에 고대 국가설화나 기록이 불분명한 신화적 이야기들이 상당히 자세히 실려 있다. 김부식은 이에 대해 "중국도 건국설화가 기이한데, 우리라고 없으란 법이 있느냐!"며 '주몽', '박혁거 등의 탄생설화를 수록한 이유를 설명한다.
그런데 김부식 한 말이 맥락이 앞 뒤가 안 맞는 것은 "왜 단군신화는 뺐을까?"라는 의문이다
100여 년 뒤에 편찬된 '삼국유사' 에는 단군신화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김부식이 이를 몰랐다고 보기도 어렵다.
결국 이는 김부식의 의도적 누락 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가장 유력한 추정은, 김부식이 철저한 유교주의자로서 종교적 성격이 강한 '단군신화'에 거부감 가졌고, 또한 '고조선'보다는 중국 문명에서 비롯된 삼국의 계보를 강조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로 보는 주장도 있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더 자세히 다루겠다.
어쨌든 김부식은 신라 건국자 '박혁거세' 탄생설화를 아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신라가 건국되기 전, 현재 경주 일대는 진한 지역으로 6촌이 존재 하던 부족 연맹체였다.
거기서부터 시작한 박혁거세 탄생 설화는 다음과 같다.
[기원전 69년, 진한 땅의 6촌 촌장들이 '알천' 남쪽 언덕에 모여 새로운 왕을 추대하기 위한 회의 를 하고 있었다. 이때 남쪽 하늘을 바라보니 ‘양산’ 아래 ‘나정(蘿井)’ 이라는 우물가에서 오색찬란한 빛이 비치고, 백마 한 마리가 꿇어 앉아 절을 하고 있었다. 촌장들이 급히 달려가 보니, 말은 사라지고 자주색 알 하나가 있었다. 그 알을 깨뜨리자 단정하고 아름다운 남자 아이가 나왔고, ‘동천’에서 목욕을 시키자 몸에서 빛이 나며 하늘과 땅이 맑아졌다. 이 아이가 태어난 알이 박(朴)처럼 생겼다 하여 성을 ‘박’, 빛나며 세상에 태어났다 하여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하였다. 이 아이는 기원전 57년, 열세 살이 되던 해에 6촌장들의 추대를 받아 신라의 초대 왕이 된다.]
이러한 난생(卵生)설화는 박혁거세뿐 아니라 고구려 ‘주몽’, 가야 ‘김수로왕’에게도 나타난다.
이들 모두 알에서 태어났다는 공통된 전설을 갖고 있다. 반면 백제시조 온조는 주몽 아들이기에
굳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필요 없었다.
이처럼 '삼국사기'에 따르면 난생 설화 속 시조들 중 가장 먼저 태어난 형님은 박혁거세인 셈 이다. ^^
그러나 이러한 설화는 말 그대로 설화일 뿐이며, 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사실은 아니다.
삼국은 모두 태양을 숭배하던 문화권으로, 지도자가 태양의 아들임을 상징하기 위해 둥근 알 에서 태어났다는 설화를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 탄생설화만으로는 진한의 6촌장들이 왜 박혁거세를 시조로 추대했는지, 또 그의 혈통은 어디서 유래했는지를 알기 어렵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설화만 전할 뿐, 역사적 배경이나 계보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다.
그런 점에서 일부는 '환단고기' 를
주목하기도 한다.
'환단고기'는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책으로, '위서'(僞書)로 간주되지만, 현실적인 설명이 담겨 있어 여기서 일부 내용을 소개한다.
[신라 전신 ‘사로’의 첫 임금은 선도산 성모의 아들로, 부여 황실 딸 ‘파소’가 남편없이 아이를 가지자 의심을 받아 부여 지역 ‘눈수’에서 도망 쳤다. 이후 동옥저를 거쳐 배를 타고 진한의 ‘나을촌’에 이르렀고, 이 소식을 들은 ‘소벌도리’라는 인물이 그녀 아이를 데려다 길렀다. 이 아이는 13세가 되자 총명하고 덕이 있어, 진한 6부가 그를 추대해서 ‘거세간(혁거세)’이 되었고, 수도를 ‘서라벌’로 삼아 국호를 ‘서라’라고 하였다.]
이 설화는 박혁거세가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 후손임을 주장하며, 고구려·백제·신라 모두가 단군의 혈통이라는 논리를 펼친다.
물론 이 기록은 100% 믿을 수는 없지만, 난생신화보다는 현실적인 이야기임은 분명하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박혁거세와 왕비 ‘알영’의 죽음에 관한 설화도 전해지며, 이는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오릉(五陵)’과 관련이 있다.
‘오릉’은 경주시 탑동 67-1에 위치한 신라 왕릉으로, 사적 제172호이다.
박혁거세, 왕비 알영, 2대 남해 차차웅, 3대 유리 차차웅, 5대 파사 이사금 등 신라 초기 왕 4인, 왕비 1인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이는 전설과 추정에 기반한 것이며, 고고학적으로 완전히 입증된 바는 없다.
신라 초기에는 ‘왕’이라는 칭호 대신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 다양한 호칭이 사용 되었다.
‘왕’이란 호칭은 22대 '지증왕'에 와서야 비로소 사용되었고, 이 때 정식 국호도 ‘신라’로 확정된다.
그런데 오릉에 얽힌 또 다른 설화가 있다. '삼국유사' 내용이다.
[박혁거세가 즉위 61년 만인 서기 4년에 하늘로 올라갔다.
7일 후, 그의 유해가 다섯 조각 으로 나뉘어 땅에 떨어졌고, 왕비도 곧 죽었다. 백성들이 두 사람을 한 무덤에 합장하려 했으나, 커다란 뱀이 나타나 막아섰다. 결국 다섯 조각 유해를 각각 다섯 무덤에 나누어 장사 지냈는데, 이를 ‘오릉(五陵)’ 또는 ‘사릉(蛇陵, 뱀 무덤)’이라 불렀다.]
이는 박혁거세 시신이 하늘에서 다섯 조각으로 떨어졌고, 그 조각 들을 각각 무덤에 안장했다는 설화다.
오늘날 오릉은 신라 박씨왕조의 상징으로 성역화되어 있어, 고고학적 발굴조차 어려운 상태다.
현실적으로는 '삼국유사'의 설화보다는, 왕비와 네 명의 왕이 안장되어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이다.
나도 속한 '박씨대종친회'는 ‘신라오릉보존회’ 만들어 이 무덤 을 관리하고 있다.
삼국 건국시조들 가운데, 무덤의 실체로 추정되는 것이 남아 있는 인물은 '박혁거세'가 유일하다.
신라건국은 이처럼 신화적 인물인 박혁거세 탄생설화로 시작되며, 이후 왕실 정통성과 신성성을 부여받았다.
다음 회에서는 가야 건국과 김수로왕 설화에 대해 이어서 살펴본다.
— 초롱박철홍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