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5

백제 건국과 소서노 2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5

ㅡ 백제 건국과 소서노 2 ㅡ


앞편에서, 백제를 건국한 '비류'와 '온조'가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친아들 아니라, 소서노가 주몽과 재혼하면서 데려온 양아들이라는 기록이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편> "또 말한다"(一云)에 나온다고 했다.


사실 '삼국사기'처럼 공인된 국정 역사서에 두 가지 설이 병기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 일이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김부식조차 당시 진실을 명확히 파악하지 못했기에 두 설 모두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역사 흐름과 당시 정황을 살펴보면, 비류와 온조가 주몽의 친아들이 아니라 소서노가 데려온 양자였다는 설이 보다 사실에 가까워 보인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처음 접했던 고구려 2대 왕, 주몽 장자인 '유리명왕'(이하 유리왕)의 설화를 보면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몽은 부여에서 대소왕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졸본으로 도망치게 된다. 이때 본처인 '예씨부인' (이하 예부인)과는 함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설화에 따르면, 예부인은 부여 '대소왕'이 마음에 두었던 여인이기도 해서 주몽과 삼각관계처럼 그려지기도 한다.


예부인이 주몽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주몽은 그녀에게 단검을 반으로 쪼개어 숨기며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긴다. 그리고 아들이 태어나면, 그 수수께끼를 풀고 숨겨진 반쪽단검 찾아 자신에게 오라고 한다.


이후 예부인은 홀로 아들을 낳고 ‘유리(유류, 누리)’라 이름 짓는다. 유리는 성장한 후, 어머니가 전한 부러진 단검을 징표 삼아 아버지 주몽이 세운 고구려로 찾아오게 된다. 다른 설에 따르면 예부인이 유리와 함께 고구려로 왔다고도 한다. 그랬다면 굳이 단검의 수수께끼가 필요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이 설화는 백제건국 단초가 된다.


만약 비류와 온조가 주몽 친아들 이었다면, 유리가 귀환하자마자 주몽이 그들을 제치고 유리를 황태자로 삼는 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자연스럽게 유리가 태자가 되었던 과정은, 비류와 온조가 주몽 친자가 아닌, 소서노가 데려온 아들들이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내용이 하나 더 있다. 역사 기록은 아니지만, 2010년 KBS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특별출연한 장면이 그것이다. 배우 '정애리'가 연기한 '소서노'가 '유리'에게 황태자 자리를 빼앗긴 후 분노 하며 주몽과 유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쏟아낸다.


"떠나지요. 고구려를 당신께 온전히 드리지요. 이 소서노, 사랑하는 내 고구려를 떠나고, 내 졸본을 떠나고, 내 고향 소노를 떠나고, 내 백성을 떠나드리지요. 하지만! 두 눈 크게 뜨고 지켜 보십시오. 이 소서노가 아들들을 데리고 무엇을 하는지. 유리 너 또한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보아라! 내 아들 비류, 온조가 너의 고구려 를 어떻게 넘어서는지. 천 대가 지나도, 만 대가 지나도, 이 소서노 후손들이 반드시 너의 고구려를 밟고 일어설 것이다."


드라마에서 설정이긴 하나, 권력 다툼 냉혹한 현실을 현실감 있게 묘사한다.


같은 시기 방영되었던 MBC 대하드라마 <주몽>에서는 소서노가 스스로 물러난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근초고왕> 에서는 권력투쟁의 주체로서 보다 사실적으로 표현된다.


왕위 계승을 놓고 벌어진 갈등의 끝에, 소서노는 주몽과 결별하고 소노부 세력과 두 아들을 데리고 남하하여 새로운 나라 ‘백제’를 건국한다.


고구려에서 이탈한 소서노 일행은 남하하여 <백제>를 세운다. 하지만 건국 과정 또한 순탄치 않았다.


온조와 비류는 도읍지를 놓고 갈등을 빚는다. 온조는 한강 남쪽의 '위례성'을 선호했고, 비류는 바닷가 '미추홀'(현재 인천)을 원했다. 결국 형제는 각자 자신의 뜻을 따라 따로 나라를 세운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십제'(후에 백제로 개명)

라 이름 붙인다.


비류는 미추홀에 정착해 ‘비류백제’를 건국한다.


그러나 미추홀 환경이 좋지 않아 백성이 고생했고, 비류는 실의 끝에 자결했다는 설도 있다.


비류가 죽은 후, 그의 백성들은 온조에게 합류했고, 백제는 더욱 강력한 국가로 성장한다. 온조는 지혜롭고 강한 지도력으로 백성을 이끌며, 주변 부족들을 통합하고 국력을 키워갔다.


온조와 비류의 출생은 여전히 불분명하다. 그러나 적어도 '삼국사기' 기준으로는 ‘주몽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백제가 고구려와 같은 뿌리를 가졌음을 강조하려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백제 건국설화에는 ‘난생설화’나 신화적 요소가 없다.


하지만 실제로 '백제'는 '고구려'를 계승한다기보다는, 정신적으로는 '부여'를 계승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고구려는 백제가 극복해야 할 경쟁자였을 뿐이다.


비류·온조 형제의 갈등과 선택은 나라 창건의 어려움과 도전을 상징한다. 그러나 백제는 결국 화합과 통합을 통해 하나의 강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특히 위례성이라는 도읍지 선택은 전략적으로도 탁월했다. 한강유역 풍부한 자원과 교통요충지를 확보 함으로써 백제는 번영의 길을 걷게 된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는 '삼국사기'와 달리 건국주체를 비류와 온조가 아니라 고구려 왕비였던 소서노가 직접 남하하여 백제를 세운 것으로 본다.


중국 사서들(예: 주서)에는 고구려 시조로 '주몽' 아닌 ‘우태’ 혹은 ‘구태’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우태는 소서노 첫 번째 남편으로 알려져 있다.


분명한 것은, 고구려를 세운 지배 집단은 부여계라는 점이다.


그래서 고구려와 건국 시기가 거의 비슷한 백제 또한 부여계가 건국한 것으로 본다.


다만, 고고학적으로는 백제와 부여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을 입증할 자료가 부족하다. 백제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을 수는 있으나, 부여와의 연결고리는 미약하다는 것이 현재 주류학계 판단이다.


백제는 한강 유역에 존재했던 해양세력(토돈 분구묘제 집단)과 고구려계 이주민이 연합하여 세운 국가로 보인다. 초창기 백제의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에 언어 차이가 있었다는 설도 있었지만, 최근 고고학적 연구 결과로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러한 시조설화 차이에 근거하여 일부사학자들은 백제 건국집단을 두 개 이상으로 가정하기도 한다. 아예 비류를 시조로 하는 다른 나라(비류백제라고 가칭됨)가 상당기간 존재했을 것이라는 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비류국 마지막 왕인 '송양왕'과, 비류국에서 이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소노부'(=비류나부)를 소서노, 비류와 연관짓는 사람도 있다.


일단 '비류'라는 이름부터가 한자까지 동일하고, '소서노'와 '소노'의 발음이 비슷하며, 소노부가 상당기간 왕비족 이었다는 점 등을 고려한 것이다.


소서노와 백제건국에 대해서는 이 정도에 마치고 다음은 신라건국에 대해 정리해 나가겠다.


초롱박철홍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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