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9

― 고구려 3대왕 '대무신왕은 두명이었을까?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9

― 고구려 3대왕 '대무신왕'은

두 명이었을까? ―


역사 글을 쓰다보면 항상 뭔가 빠뜨린게 있다 싶다.


다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자료 뒤적이다 보면 “어, 이건 뭐지?” 싶은 게 꼭 하나쯤 튀어나온다.


이상하게 그런 것들이 대부분 정설은 아니고, 후대에 나온 ‘설’이나 ‘그럴 수도 있다’ 수준의 추정된다는 이야기들이다. 굳이 신경 안 쓰고 그냥 넘겨도 되긴 하지만 그런데 그런 ‘설’이 상식적, 합리적으로 정작 더 말이 되는 경우가 많다.


오늘 올리는 글이 딱 그렇다.


나도 처음 보는 내용 많아서 글을

몇 번이나 지웠다 썼다 하면서 정리했다. 솔직히 좀 골치 아팠다. 읽는 여러분들도 아마 머리 좀 아플 것이다.


우리는 삼국시대라고 하면 <고구려, 백제, 신라>만 생각한다


어떤 학자들은 삼국시대를 ‘원삼국시대’랑 ‘삼국시대’로 나누기도 한다.


'원삼국시대'는 삼국이 막 건국 하기 시작한 기원전 1세기부터 서기 3세기쯤까지, 고구려, 백제, 신라 전신이 되는 각 지역 여러 소국들이 형성되고 발전하던 시기 이다. 삼국이 소국들 사이에서 서로 눈치 보면서 크고, 싸우고, 밀리고 밀면서 결국 완전한 고대국가 체제를 완비해가던 시기를 말한다.


그런데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원삼국시대' 기록들이 이상하리 만치 말이 안 되는 부분 많다.

너무 앞뒤가 안 맞고, 현실감이 없고, ‘이게 진짜였을까?’ 싶은 게 한, 두 개가 아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태조왕'은 120세를 넘게 장수 했으며, 무려 93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생물학적으로 매우 이례적인 사례일 뿐 아니라, 고대사회 평균 수명을 고려할 때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기록이다.


또한 백제 '고이왕'에 대한 '삼국사기' 기록 역시 생몰연대가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다. 고이왕은 기원전 6년에 태어나 서기 286년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무려 290여 년을 살았다는 말이다. 이 역시 생물학적, 역사적 관점에서 실현 가능성이 전혀없는 불가능한 수치이다.


이러한 수명이나 재위기록은 고대 왕의 위엄을 강조하거나 왕조의 정통성을 부각시키기위한 문학적, 정치적 과장이 개입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들은 당시 역사인식 한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사실 여부 대해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특히 오늘 이야기하려는 고구려 3대왕, '대무신왕'은 아예 두 명 이었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근데 문제는 그 설이 은근히 말이 된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은 동명성왕 '주몽 13세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장수왕' 시기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비'에는 '광개토대왕' 이 '주몽 17세손'이라고 적혀져 있다.


아래 광개토대왕비 원문이다.


[옛적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었다. ...(중략)... 고명(顧命)을 이어받은 세자 유리왕은 도(道)로써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은 왕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었다. 17세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호(연호) 를 영락(永樂)이라 하였다.]


ㅡ 광개토대왕릉비(414) ㅡ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비'를 비교해보면 광개토대왕이 동명성왕(주몽) 자손인 것은 맞지만 그 사이 '3세손'이 빈다.


광개토대왕비는 광개토대왕이 죽고 그 아들 '장수왕' 시절 세운 '비'이기에 삼국사기 기록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사실일 것이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광개토대왕비'를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안 봤다는 것이 사실에 더 부합할 것이다.


우선 19대 광개토대왕까지 왕 계보를 살펴보자.


[동명성왕 - 유리명왕 - 대무신왕 - 민중왕 - 모본왕 - 태조왕 - 차대왕 - 신대왕 - 고국천왕- 산상왕 - 동천왕 - 중천왕 - 서천왕 - 봉상왕 - 미천왕 - 고국원왕 - 소수림왕 - 고국양왕 - 광개토대왕]


여기서 '민중왕', '모번왕'은 '대무신왕' 아들들로 기록되어 있기에 같은 세대 손이 된다.

'산상왕'은 고국천왕 동생이므로 같은 세대 손이다. 또한 신대왕을 차대왕 아들로 보는설을 채택한다 해도 광개토대왕은 '주몽 16세손' 이 된다.


태조대왕 생몰년대나 재위기간과 함께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기록인 것이다.


그래서 그 사이에 알려지지 않은 왕이 하나 더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삼국지위서동이전'에 중요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주몽 뒤를 '여달'(유리왕)이 잇고, 여달의 뒤는 '여율'(대무신왕)이 이었고, 여율의 뒤를 '막래' (모번왕) 가 이었다고 나온다. (아래 사진 참고)


그런데 '여달'을 유리왕으로 보고, '삼국지위서동이전'에 '막래'가 부여를 쳤다는 기록을 근거로 막래를 '모본왕'이 아니라 '대무신왕'으로 보고 있다.


유리왕과 대무신왕 사이에 사라진 왕이 한 명 더 있게 된다면, 광개토대왕비 세대가 맞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러가지 복잡한 설이 있으나 대무신왕이 또 한 명 존재했다는 설이 요즈음 힘을 얻고 있다.


즉, 유리왕 아들인 대무신왕(A)과

유리왕의 다른 왕비소생 자식이나 형제인 또 다른 대무신왕(B)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왕이 되었지만, 후에 대무신왕 B가 대무신왕 A의 업적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기록에서 대무신왕 A를 완전히 지워버렸다는 설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앞서 말한 혼선들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여러 모순들이 있다.


서기 13년, '무휼'(대무신왕)이 고구려군 총사령관으로 나서 부여를 격파했다고 나온다.


그런데 그 바로 다음 해인 서기 14년, '무휼'이 태자가 되었고, 그 당시 나이는 11세였다. 그렇다면 부여를 격파할 때는 무휼은 고작 10세였다는 말이 된다. 아무리 고구려가 군사국가라 해도 열 살 짜리를 총사령관으로 세우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이것만 봐도 기록에 무언가 틈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사기'에 따르면, 유리왕은 기원전 18년, 송양 딸(다물후)을 왕비로 삼았고, 기원후 18년에 사망했다. 그 사이 서기 4년에 무휼이 출생 했다. 첫 왕비를 맞이하고 22년이 지나서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따라서 무휼은 첫 왕비 아들일 가능성은 낮다.

그렇다면 유리왕에게는 기원전 시기, 즉 첫 왕비에게서 이미 성인된 아들이 하나 더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아들이 30대 초반에 고구려군 총사령관이 되어 공을 세우고,

태자가 되어 대무신왕 A가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나중에, 서기 4년에 태어난 다른 왕비의 아들, 즉 대무신왕 B가 권력 다툼에서 이기고 대무신왕 A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무신왕 A의 업적을 지워버리고 대무신왕 B의 업적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같은 이야기이지만 교차검증된 역사로는 이 이야기가 훨씬 진실에 가깝다고 보여진다.


이런 해석은 유리왕 ‘황조가’와도 맞물린다.


전통적으로 사랑 노래로 해석되던 '황조가'는, 실은 두 왕비족 사이 에서 갈등하며 괴로워하던 유리왕 심경을 담은 노래라는 견해가 주류설이다.


고구려초기는 5부족연맹체였고,

왕권은 약했으며, 왕비족 세력이 강력한 권력을 가졌다.


왕비족 간 피터지는 싸움 속에서,

첫 왕비 소생 아들인 대무신왕 A는 결국 살해당하고, 승리한 왕비 쪽 자식인 대무신왕 B가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추정을 바탕으로 하면,

삼국사기의 모순된 기록,

광개토대왕비의 17세손이라는 표현 '삼국지위지동이전'의 모든 기록들이 하나로 설명이 된다.


비록 '삼국사기'의 원삼국시대 기록들이 비합리적이고 상식에서 벗어나는 부분이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삼국사기 전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고려시대 김부식도 이러한 문제점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백제 고이왕, 고구려 태조왕, 대무신왕 등의 연대 문제는 그가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부식은 원칙주의자 였다.


고구려의 '신집', 백제 '서기', 신라 '국사' 등 당시까지 전해 내려오던 삼국 '정사'(正史)들 기록을 무시 하고 자기 마음대로 쓸 수는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부식이 당시에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각주나 해설을 달아 주었으면 훨씬 좋았겠지만,

그는 그렇게 친절한 서술자는 아니었다.


또한, 국가적으로 추진된 대규모 역사편찬 사업에서, 그는 자신 생각을 지나치게 삽입하는 것을 스스로 자제했을 가능성도 있다.


어쩌면 김부식은, “기록은 남기되 해석은 후대의 몫”이라 생각 했는지도 모른다.


우리 후손들이 이런 식으로 퍼즐 맞추기를 하도록 말이다.


이처럼 역사적 참된 진실을 밝히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어서 대무신왕 시대 일어난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편>이 계속 됩니다.


― 초롱박철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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