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8

고구려 2대 왕 '유리왕'과 '황조가', 그리고 '설화'들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8

― 고구려 2대 왕 '유리왕'과 '황조가', 그리고 '설화'들 ―


[翩翩黃鳥(편편황조)

펄펄 나는 꾀꼬리여,

雌雄相依(자웅상의)

암수가 서로 의지하네.

念我之獨(염아지독)

내 홀로 있는 것을 생각하니,

誰其與歸(수기여귀)

누구와 함께 돌아가랴.]


이 시, 학창시절 정말 많이 봤을 것이다. 특히 역사시간이 아닌 국어시간에 더 자주 접했을 것이다. 어쩌면 연애편지 쓸 때도 종종 인용했을지 모르겠다.


이 시는 바로 고구려 제2대 왕 '유리명왕'(이하 유리왕)이 BC 17년, 즉위 3년에 지었다고 전해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된 개인 서정시인 '황조가'(黃鳥歌) 이다. 이는 '삼국사기'에 4언 4구 한시로 번역되어 실려 있다.


금관가야 '구지가'(龜旨歌), 신라 '도솔가'(兜率歌), 백제 '정읍사' (井邑詞)와 함께 고대 서정요로 전해지고 있으며, 국어·국사 시험에도 자주 등장하는 작품들 이다.


'유리왕'은 고구려시조 동명성왕 '주몽'과 관련된 설화로도 유명 하다. 이 이야기는 과거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있었는데, 지금은 모르겠지만, 나 때는 분명히 있었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왕들 중, 두 개의 설화가 국어교과서에 실린 인물은 고구려 유리왕이 유일무이 하다. (참고로 신라에도 유리왕이 있었지만, 인물은 다르다.)


유리왕 첫 번째 설화는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나, 내용에는 차이가 있다.


설화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유리는 BC 38년 동부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주몽은 유리가 태어나기 전 동부여를 떠났고, 유리는 어머니 ‘예씨’와 함께 아버지 없이 성장했다.


주몽은 떠나기 전, 예씨에게 “아들을 낳으면 일곱 모가 난 바위 위의 소나무 아래에 증표를 숨겨두었으니 그것을 찾아 나에게 보내라”는 아리송한 말을 남겼다.


성장한 유리는 어머니로부터 그 말을 전해 듣고 수수께끼 장소를 찾아 헤매지만 결국 찾지 못해 낙담한다. 그러다 우연히 자신이 살고 있는 집 기둥이 일곱 모난 주춧돌 위에 세워진 소나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바로 그 아래에서 주몽이 남긴 징표 ‘동강난 칼’을 발견하게 되고, BC 19년 4월, 고구려를 세운 주몽을 찾아간다.


주몽은 유리가 가져온 칼 조각을 자신이 보관 중인 칼과 맞춰보아 유리를 친아들로 인정하고 태자로 삼는다.]


이 설화 이후의 이야기는 더욱 극적이다.


유리가 고구려에 도착했을 때, '주몽'은 이미 '소서노'와 재혼하여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이 있었다.

(이 두 아들은 주몽 양자로, 소서노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아 데리고 온 아들이라는 설이 강하다.)


결국 비류와 온조는 굴러온 돌 유리에게 태자 자리를 빼앗기고, 어머니 소서노와 함께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 백제를 건국하게 된다.


이 설화에 따르면, 유리가 주몽의 남긴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다면, 백제도, 삼국시대도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유리왕 관련 또 하나의 설화도 있다. 이 이야기에서는 수수께끼, 칼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유리가 고구려를 찾아와 아버지 주몽과 함께 음식을 먹는 자리 에서 왼손으로 술잔을 돌리는 것을 보고, 주몽이 자신과 같은 왼손잡이라는 점에서 친아들임을 알아보았고, 곧바로 유리를 태자로 삼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설화는 조금 신빙성이 떨어진다. 단지 왼손잡이라는 이유만으로 친자임을 확신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어쨌든 유리가 태자가 된 해 9월, 주몽이 죽고 유리는 왕위에 오른다.


유리왕 첫 부인은 송양(松讓)의 딸, 송씨이다.


그러나 유리왕의 치세는 순탄치 않았다.


유리가 태자가 되자, 소서노와 그녀를 따르던 세력들은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했고, 고구려에 남은 세력들조차 유리왕에게 완전히 충성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유리왕은 즉위 후 도읍을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기게 된다. 왕권안정은 쉽지 않았고, 이 시기 후비들 간 갈등 까지 겹치며 유리왕은 내외적으로 많은 고뇌를 겪는다.


이 때 유리왕 두 번째 설화가 탄생했다.


[유리왕 즉위 3년, 왕비 송씨가 죽자 유리왕은 두 명의 여인을 후궁으로 들인다.


한 명은 '화희'(禾姬), 골천사람의 딸. (벼농사 중심, 평야 세력 상징)


다른 한 명은 '치희'(雉姬), 한(漢)나라 사람의 딸. (산악지대, 북방 세력 상징)


두 여인은 서로 질투와 경쟁으로 불화했고, 왕은 결국 '양곡'(凉谷) 에 각각 동궁과 서궁을 지어 이 두 왕비를 따로 머물게 했다.


어느 날 유리왕이 '기산'으로 사냥을 떠나 7일간 돌아오지 않자, 화희가 치희에게 “한나라 천한 여자가 무례하다”는 모욕을 하며 다툼이 벌어진다. 치희는 분노와 수치심에 한나라로 돌아가 버린다.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유리왕은 말을 몰아 뒤쫓지만, 치희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움과 상실감에 젖은 유리왕은 꾀꼬리들 이 나뭇가지에 노니는 모습 보고 이 노래, '황조가'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황조가'는 단순한 개인적 연애시가 아니다. 황조가에는 유리왕 이 겪은 복합적 감정과 정치적 고난이 담겨 있다.


표면적으로는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아픔을 꾀꼬리(황조)의 이미지로 우회적으로 표현한 개인적 서정시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황조가는 혼인정책을 통한 부족통합이 실패로 돌아간 정치적 갈등 상징으로도 읽힌다.


'화희'는 벼농사 중심 평야세력 (농업기반 부족)


'치희'는 산악과 북방세력,

(꿩으로 상징)


유리왕은 이 두 세력을 혼인으로 통합하려 했으나 두 여성 갈등 으로 한 세력(한나라계 치희)을 잃고, 정치적·군사적 기반마저 약화되었다.


즉, '황조가'는 개인적 로맨스와 정치적 시련이 함께 녹아 있는 서사적 시가라고 볼 수 있다.


유리왕은 선왕인 주몽과 달리 신화적 영웅이 아닌, 현실적인 고난을 겪는 인간 군주였다.


그는 후궁 간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 아들인 '해명태자'를 자살로 몰고 간 사건까지 맞이한다.


이 이야기 역시 유리왕 설화의 어두운 면을 보여준다.


해명태자만이 아니라, 세 아들이 자살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유리왕 치세에서 벌어진다. 이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다루겠다.


결론적으로 유리왕은 단순한 설화의 주인공이 아니라, 고구려 초기 왕조를 안정시키고 국력을 강화하며 영토 확장에 기여한 중요한 군주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권력욕에 눈이 멀어 주몽을 독살하고 세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그의 생애와 설화는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고대 한국 문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며, 왕가 갈등과 인간적인 면모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는 소중한 이야기다.


– 초롱박철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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